Sound Mind Sound Body
오랜 구력의 엔지니어가 기계의 소리만 듣고도 어디에 나사가 풀렸는지 알아채듯, 나도 이제 대회장에 서면 본능적인 스캐너가 작동한다. 출발선에 모인 러너들의 외형만 쓱 훑어봐도 그들의 내공이 데이터처럼 읽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잘 그을린 피부, 군살 없이 단단하게 깎인 종아리 근육, 신발 밑창의 마모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 출발 직전의 그 침착한 눈빛. 이런 데이터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러너들의 세계에는 고도의 심리전도 존재한다. 처음 만나는 러너들과 리스펙트 차원에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열에 아홉은 소위 밑밥을 깐다. "아유, 제가 요즘 무릎이 안 좋아서요." "어제 야근하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네요. 오늘은 그냥 완주가 목표입니다." 하지만 이런 겸손함에 속으면 안 된다. 총성이 울리는 순간, 무릎이 아프다던 사람은 캥거루처럼 튀어 나가고, 잠을 못 잤다던 사람은 카페인을 혈관에 꽂은 듯 질주한다. 결국 피니시 라인에 들어오는 순서는 그들의 몸에 새겨진 데이터대로, 그들이 흘린 땀의 두께대로 정해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동네에서 열린 작은 대회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지역의 내노라하는 고수들이 제법 보였다. 레이스가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서너 명의 선두 그룹이 형성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했다. 반환점을 돌 때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하며 미소를 주고받았는데, 그 짧은 찰나에 "짜식, 제법인데?"라는 무언의 인정과 감탄이 오갔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페이스메이커 삼아 끝까지 밀어붙였고, 우리 무리가 상위권을 휩쓸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시상식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3위 입상자를 호명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낯선 얼굴이 포디움에 올라온 것이다. 단상 위로 올라오는 남자를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의 몸에는 달리기가 전혀 새겨져 있지 않았다. 헐렁한 티셔츠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뽀송뽀송한 얼굴, 무엇보다 레이스 도중 선두 그룹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트로피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사진까지 찍었다. "저 사람, 코스 다 안 돌았어요!" 결국 누군가의 클레임이 들어갔고, 기록 칩을 확인한 결과 그는 반환점을 찍지 않고 중간에 질러온, 명백한 치팅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나는 그가 쫓겨나는 뒷모습을 보며 씁쓸함을 넘어 기이함마저 느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실수로 코스를 이탈한 것도 아니고, 고의로 지름길을 택해놓고 포디움에 올라가 웃을 수 있는 그 강철 같은 멘탈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 역시 과거에 칩 오류나 코스 혼동으로 본의 아니게 기록이 잘 나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행운이 아니라 불쾌함이었다. 내 실력이 아님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에, 마음 한구석이 내내 불편했고 기록증을 보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자신의 다리를 속이고 얻은 플라스틱 조각이 과연 그에게 어떤 성취감을 줄 수 있을까. 과정 없는 결과는 그저 예쁜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몰랐던 걸까.
이 사건을 겪으며 나는 지난봄, 보스턴 마라톤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홉킨턴에서 출발선으로 걸어서 이동하는 션(Sean) 형님을 우연히 보았다. 우리가 아는 그 기부천사, 대한민국 달리기의 성인, 바로 그분이다. 화려한 연예인임에도 불구하고 매니저나 카메라 팀 하나 없이, 홀로 묵묵히 출발선을 향해 걸어가고 계시는 모습에서 무거움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수도승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그는 보스턴에 이어 런던, 베를린 등 세계 6대 마라톤과 시드니 마라톤 까지 당당히 7대 마라톤을 완주했다. 다만, 냉정하게 말해 그는 자력으로 출전권을 획득한 퀄리파이어는 아니다. 기부를 통한 자선 러너 자격으로 뛰거나, 엠버서더 초청 같은 프로그램으로 뛰는 것이었을 테다.(확실 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모두가 아는 것 처럼 존경받아 마땅한 우리의 우상이다. 81.5km를 뛰며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고, 루게릭 요양병원을 짓기 위해 달리는 그의 헌신과 사랑은 기록 따위로 재단할 수 없는 숭고한 가치다. 1년 안에 7대 마라톤을 모두 완주하겠다는 그의 목표 또한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을 요구하는 위대한 도전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감히 짐작건대, 그의 마음 한구석에도 아주 작은 허전함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모두가 그를 존경하지만, 러너로서의 그는 혹시라도 그 엄격한 기준 기록(보스턴의 경우 BQ라고 한다)을 자력으로 통과해 당당히 그 출발선에 서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았을까. 굳이 그럴 필요 없는 위치에 있는 분이지만, 달리기라는 정직한 운동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런 순수한 갈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상상을 해보았다.
요즘 주변을 보면 BQ 기록 없이도 세계 6대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하는 분들이 많다. 보스턴에 한번 가보는 게 꿈이라며 간절함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장은 영리하게도 그런 꿈을 위한 상품을 내놓았다.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대회 투어 패키지가 그것이다. 대략 5,000불(한화 약 700만 원) 정도를 지불하면, 기록이 없어도 누구나 꿈의 무대인 보스턴, 런던, 도쿄 마라톤을 뛸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기회를 사는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평생의 버킷리스트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러너에게 대회란, 단순히 비행기를 타고 가서 42.195km를 뛰고 오는 이벤트가 아니다. 그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새벽잠을 설치며 훈련하고, 부상과 싸우고, 수없이 실패하다가 마침내 기준 기록을 통과했을 때 얻어지는, 준비 과정의 총체다. 5,000불을 내고 산 배번호와, 5,000km를 달려서 얻어낸 배번호. 피니시 라인에서 받는 메달은 같을지 몰라도, 그 메달의 무게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전자가 쇼핑이라면, 후자는 수련이다. 돈으로 산 경험은 화려한 SNS 사진으로 남겠지만, 땀으로 산 경험은 내 근육과 뼈, 그리고 심장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누군가는 꼰대 같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즐기면 그만이지, 왜 그렇게 팍팍하게 구느냐고. 하지만 쉽게 얻어지는 경험들은 속이 빈 깡통이나 다름없다. 빈 깡통은 굴러갈 때 요란한 소리를 내지만, 밟으면 쉽게 찌그러진다.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돈만 내고 덜컥 큰 대회에 나갔다가는, 몸이 먼저 비명을 지를 것이다. "주인님, 우린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이러다 다 망가져요!" 그 경고를 무시하면 부상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
말이 길어졌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이왕 운동화 끈을 묶고 달리기를 시작했다면, 좀 더 당당해지자는 것이다. 지름길로 질러가서 얻은 트로피보다, 돈으로 산 메달보다, 비록 기록은 조금 늦더라도 정직하게 흘린 내 땀방울이 훨씬 더 값지다. 달리기는 반짝하고 마는 이벤트가 아니라, 우리 인생과 평생 같이 가는 동반자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요령 피우지 말고, 묵묵히 나만의 마일리지를 쌓아가자. 그렇게 쌓인 시간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내 종아리에, 내 심장에, 그리고 내 눈빛에 오롯이 새겨져, 언젠가 출발선에 섰을 때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아우라가 되어줄 테니까. Sound Body Sound Mind를 나는 순서를 바꿔 놓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