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거리의 언젠가는 잊혀질 풍경을 담다.
울 거리는 두가지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한가지는 도보로 바라보는 느리고 낮은 관점이고, 또 하나는 차로 이동하며 빠르고 다소 멀리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물론 거리의 대부분은 마치 시간이 지나도 그리 바뀌지 않을 것 같이 보이지만, 차를 타고 지나며 보는 거리는 일상이 거듭될 수록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화를 더하며 언젠가는 잊혀진 풍경으로 남을 숙명을 지녔다.
한남동에서 강남역을 지나 양재역에 이르는 쭉 뻗은 도로는 강남을 개발하면서 종단 도로로 가장 중심 축을 이루는 대로이다.
한강변에서 진입해서 양재역 쪽으로 왕복 8차선의 도로를 달려 내려가다보면, 강남대로는 대형 빌딩들의 호위를 받는 출정식의 거리같다는 느낌이 든다.
강남교포타워는 강남대로 변에 늘어선 빌딩 중 단연 눈에 띄는 건물 중 하나이다.
지하철 9호선이 개통되며 신논현역의 역세권으로 역사에서도 바로 이어질 수 있는 위치에 있지만, 기존 강남역 주변의 번화한 곳에서는 다소 떨어저 있는 한적한 사거리였던 이 곳을 강남 교보타워가 들어서며 풍경을 바꿔놓았다. 오히려 풍경을 압도했다라는 표현이 맞으리만큼 주변 경관에 비해 육중하고 눈에 띄는 색체의 이 건물은 다소 무겁고 어두은 느낌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익숙해진 교보타워는 이미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낯 익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듯 하다.
이 건물은 잘 알려진 것 처럼,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한 것으로 지하 8층 지상 25층의 규모로 최고 높이가 117.8m에 달한다. 건물 외관을 적벽돌 판넬로 마감함으로써 육중한 색감을 주고, 단순해 보이지만 곳곳에 의도된 굴곡으로 변화를 주어 조형미를 갖춰 특징을 더했다.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이 건물은 건축주와 설계가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며 약 10년에 걸쳐 17차례나 설계안의 재수정을 요청한 결과물이기도 합니다. 교보의 신용호 회장은 이 교보타워가 강남 일대에 가장 주목받는 랜드마크이기를 바랬고, 손수 디자인과 소재등의 선정에도 관여하며 오랜 기간에 걸친 설계 수정을 주도했다고 하는 일화로 잘 알려져 있다.
자연광으로 보이는 대낮의 외관과는 달리, 굴곡 사이로 조명이 새어나오며 새로운 윤곽을 나타내는 밤의 교보타워는 마리오보타의 설계상 의도했던 조형미를 더욱 더 두드러지게 하기도 한다.
스위스 태생의 마리오보타는 어렵디 어렵운 설계 확정 과정을 거쳐 교보타워 건축이 완성된 후 한국의 건축주와는 다시는 설계를 안 할 듯 했지만, 이후 다시 삼성의 제안을 받아들여 한남동에 소대한 미술과 리움의 건축에 렘 콜하스와 장누벨과 함께 3인의 공동 작업을 통해 참여하게 된다.
일제시대를 겪은 서울에는 옛 궁궐들의 수난사가 유독 많이 눈에 띄곤 한다.
경복궁의 경우에는 궁궐내에 위치한 공무를 보는 건물들인 궐내각사들이 헐려 일본인들의 집을 짓는데 사용되기도 했고, 창경궁의 경우에는 동물원과 유락시설을 갖춘 공원으로 한동안 사용되기도 했다.
창덕궁을 의도적으로 비원으로 부르게 된 것도 그러한 일제시대의 문화 말살을 의도한 잔재이다.
창덕궁 후원을 일컫는 비원으로 창덕궁 전체를 칭하게 하므로써 일개 정원이나 공원 정도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지금의 창덕궁은 다른 고궁에 비해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형태로 개방이 되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97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기도 했다.
창덕궁은 우리가 아는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은 세월 사용된 궁월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이후에 소실되어 다시 지어졌고, 이 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 까지 정궁의 역할을 대신하며 오랜 시간 사용되었기 떄문이다. 일제가 홰손시킨 부분을 조선 후기의 기록에 의존하여 진행하는 창덕궁의 복원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돈화문은 창덕궁의 정문으로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 중에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현재 전각 부분은 자유 관람이 가능하며, 후원 지역은 별도의 추가 요금과 제한된 관람을 통해 둘러볼 수 있다.
서초역 사거리에서 한강쪽을 바라보며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양 쪽 산허리를 연결한 기하학적인 모양의 다리가 꽤 높은 위치에서 도로를 가로질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차들의 속도가 빠를 때는 흘려 지나갈 수 있지만, 사진처럼 상습 정체가 만연한 구간이라 양 방향에서 모두 다리를 올려 볼 수 있는 때가 많다.
이 다리는 사람들만 건너는 보도 육교로 이름은 '누에다리'이다. 다리의 이름은 누에고치를 뜻하는 말로 친환경 적인 공공시설을 건설하며 붙인 것이며, 이 지역이 조선시대의 양잠기관인 잠실도회가 있었다는 점에서 착안된 것이기도 하다. 건축 당시 다리 이름을 정하기 위해서 시민 공모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에 따라 현재의 누에다리로 이름이 정해지게 되었다.
이 다리를 통해 반포로로 인해 끊어진 양 측의 녹지축을 사람들이 이어서 다닐 수 있게 되었고, 서리풀 공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보다 더 높은 접근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마치 살아있는 누에가 움직이며 하늘을 가로질러 건너가는 듯한 형태와, 비단실을 연상하듯 다수의 가는 선으로 둘러 쌓인 다리의 조형미는 보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다리에서 내려다 볼 때 체감하는 높이가 상당해서, 보행 육교로는 가장 높은 곳에서 조망을 할 수 있는 다리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기에 LED로 설치된 경관 조명은 이 다리의 야경에 새로운 가치를 더해 주기도 한다. 총 2,300개의 LED가 설치되었고 전체적으로 통일된 색감에 중간 중간 포인트가 더해져 세련되어 보이는 다리의 야경을 선사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전 국민은 다이아몬드 커터로 중앙청 최상단 부의 돔이 절단되고 건물이 해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근대건축물에 대한 가치와 일제 치하의 역사적 경각심을 중앙청을 통해 고취시키기 위해 존치해야 한다는 여론과, 상징적으로 일제 치하의 가슴아픈 역사와의 단절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고려 사이에 팽팽한 울타리기를 하던 중 결국 철거로 결정이 났던 것아다.
이처럼 서울 내에 보존되고 있는 근대건축물들에서 일제 시대의 흔적을 빼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다.
현재는 화폐박물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있는 옛 한국은행 본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폐박물관 건물은 1907년 일제의 제일은행 경성지점으로 공사가 시작되었고, 이후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게 되는 조선은행 본점으로 용도가 바뀌어 1912년 완성되기에 이른다.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가 조선 침탈을 하기 위한 중앙 금융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곳이다.
이후 해방 뒤에도 계속 은행 건물로 사용되다가 6.25전쟁을 거쳐 다시 복원을 했고 한국은행의 본관 건물로 1989년까지 그 본연의 용도를 이어갔던 긴 역사의 은행 건물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이 정부 청사의 역할을 했던 것 처럼, 세월이 지나서도 조선은행 본점을 통해 중앙 은행 기능을 이어온 역사적 아이러니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확한 좌우 대칭의 유럽풍 르네상스 양식으로 일제 치하에서 지어진 다른 근대 건물들과 그 형식은 동일하다.
근대 건축물에 대한 최근의 인식과 자신감이 높아진 사관으로 비춰 계속 보존될 것으로 생각되긴 하지만, 그 어떤 정치적인 결정에 의해 멸실의 길을 겪게 될 지도 모로는 위태함 또한 공존하는 건물이다.
일본 치하에서 순수 민족자본으로 지어진 화신백화점은, 선일지물 사장 박홍식에 의해 1931년 지어졌다. 이후 오랜 역사와 우여곡절을 거치며 백화점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1980년대 과도한 투자로 인해 화신산업과 계열사가 모두 해체되며 1986년 2월 화신백화점도 문을 닫게 된다.
이후 서울시의 종로 확장을 위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1999년 준공된 종로타워가 들어서게 된다. 종로타워는 지상 33층의 133m 건물로 약 4년의 공사과정을 거쳐 준공된 강북 구도심권에서 눈에 띄는 랜드마크다.
이 건물의 상층부은 탑클라우드 레스토랑이 들어선 최 상층과 하층부가 분리되어 기둥으로 지탱이 되는 독특한 외관을 지니고 있다. 건축가의 놀라운 발상이 실현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로타워가 이러한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은 규제의 틀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건설 당시 청와대가 고도 제한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공군 작전용 공중 통로를 건설사인 삼성측에 요청하여 설계가 변경되었다는 것인데 확인된 것은 아닌 듯 하다. 여하튼 현재에는 독특한 외관의 랜드마크로 사각형 일색의 종로 변 건물들 중 단연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종로타워의 건설은 1988년 화신백화점 부지를 삼성생명이 한보주택으로부터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설계는 우루과이 태생의 미국 건축가인 라파엘 비뇰리가 공모전을 거쳐 맡게 되었다. 대로와 비스듬하게 빗겨 서게된 건물의 형태에 대해 기존 건축계에서의 반감도 적지 않게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1990년대 중반 유통사업 진출을 모색하던 삼성에 의해 백화점 건물로 사용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IMF를 겪으며 수정되었고, 일반 사무실 용도로 변경되기에 이른다. 항간에는 도심 중간에 위치한 입지 탓에 백화점으로 사용될 경우 과밀부담금의 부과액이 부담이 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 또한 정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최근 이 건물이 매물로 나오게 되었고 결국 며칠 전 싱가포르계 투자사인 알파인베스트먼트에게 지분의 81%가 약 3000억원 규모로 매각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희 회장이 매우 애착을 가졌던 서울 도심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도 경기 침체를 대비하기 위한 삼성의 부동산 매각 정책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서울 도심의 건물 하나하나에는 사연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주인이 바뀌고, 터에 얽힌 사연을 품고, 혹은 건축주 사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세세한 기록을 모두 담고 있는 듯 하다.
익숙한 풍경을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곤 한다.
하지만 이 모습들도 세월이 지나면 찾기 어려운 과거의 풍경들이 될 것이다.
늘 지나던 3.1 고가도로는 이미 헐려 버렸고, 청계천을 복개했던 도로들은 파헤쳐 졌으며, 약수동과 아현동을 넘다들던 고가도로는 헐려버렸다.
창덕궁은 비원으로 불리며 문을 꼭꼭 닫고 있다가, 다시 원래의 이름을 회복하며 시민들에게 닫힌 문을 열었다.
화신백화점은 민족자본으로 장안에서 제일 번화한 백화점으로 사랑받았지만, 사세가 기울고 도로 확장되며 폐업 후 4개월만에 흔적도 없이 헐려버리기도 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서울의 도심 풍경은 이처럼 우리 곁에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만 남아있지 못할 숙명을 지녔다. 자본의 논리와 효율성을 쫒아 부쉬고 다시 세우고를 반복하는 동안, 늘 그 곁에 있던 우리조차 모르는 광폭한 변화는 항상 진행형이다.
도심을 지나며 사진을 남기도 여기 사족을 덧붙여 기록을 하는 의미는 바로 잊혀질 숙명의 도심 풍경을 마음 속에 박제해 두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또 그 도시 풍경에 덧입혀져 있을 크고 작은 추억을 붙들어 두고 싶은 작은 욕심도 더해 본다.
#서울, #도시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