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와 윤동주의 고백
화려한 색채를 걷어낸 흑백의 화면 속 시인 윤동주는 끊임없이 고개를 숙입니다.
총을 든 군인 앞에서가 아닙니다.
펜을 든 자신 앞에서, 그리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사촌 송몽규 앞에서 그는 늘 부끄러워합니다.
영화 <동주>는 우리에게 묻습니다.세상이 미쳐 돌아갈 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
윤동주가 평생을 안고 살았던 그 부끄러움의 정체는 과연 나약함이었을까요 아니면 시대를 비추는 가장투명한 거울이었을까요.
친구들은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는데, 자신은 일본의 대학 강의실에 앉아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 윤동주는 그것을 괴로워했습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 윤동주, <쉽게 쓰여진 시> 중 -
심리학적으로 볼 때, 수치심(Shame)은 자신이 타인의 기대나 도덕적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느낄 때 발생하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윤동주의 부끄러움은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비겁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맑은 양심이 시대의 어둠을 감지했기 때문이였을 겁니다.
남들은 무뎌져서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그는 시인의 감각으로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운 걸 모르는 놈들이 부끄러운 거지."
영화 속에서 윤동주가 괴로워할 때, 그의 스승 정지용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대사는 영화의 주제를 관통합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남의 나라를 짓밟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변절한 지식인들은 권력 앞에 무릎 꿇고도 당당했습니다.
진짜 괴물은 고개를 숙인 윤동주가 아니라 고개를 뻣뻣하게 든 그들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내 안에 옳고 그름을 비추는 거울이 깨지지 않고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기에 부끄러움은 나약함이 아니라 가장 인간답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2026년의 풍경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는 "어쩔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변명이 처세술이라는 이름으로 세련되게 포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섬세한 마음은 나약함으로 치부되고 오히려 뻔뻔할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태도가 능력이라 인정받는 흐름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윤동주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어쩌면 지금 우리 곁에 다시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돌아보게 됩니다. 윤동주는 마지막 취조실에서도 서명하기를 거부하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지켜냈습니다. 그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이유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양심을 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문득, 나의 부족함이나 비겁함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이 있었나요?
그렇다면 안도하셔도 좋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아직 맑고, 당신은 여전히 뜨거운 사람이라는 증거니까요.
부끄러워하십시오. 그것은 당신이 살아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