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감기가 아니다

‘힘내’라는 말이 나를 죽일 뻔했을 때

by 숨나

"우울증은 마음에 오는 감기래. 곧 좋아질 거야. 힘내."


맞아요. 마음에 오는 감기라는 말.

그건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뜻이지, 진짜 감기처럼 일주일이나 한 달이면 낫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힘내"라는 말은 저를 가장 힘 빠지게 하는 위로였고,

"곧 좋아질 거다"라는 말은 희망고문이 되어 가슴을 옥죄고 후벼 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거야"라는 말은 무기력의 늪에 빠진 저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 뿐이었죠.


그래요, 알고 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답답하고 안쓰러워 힘들다는 것을요.

하지만 우울이 해일처럼 휘몰아치면 주변을 살필 여력 따위는 남지 않습니다.

제 영혼은 이미 전소되어 버렸으니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남편은 옆에서 조심스레 말을 건넵니다.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보라고요.


휴... 하고 싶은 일이라니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아무것도요!


하고 싶은 게 없다는데 자꾸 물어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제안하더군요.

정 생각이 안 나면 예전에 하고 싶어 했던 일이라도 떠올려 보라고요.


하지만 저에게 과거의 꿈이란,

이미 구겨서 난로 불에 처박아버린 옛 남자 친구의 러브레터 같은 것이었습니다.

재만 남은 종이 조각 말이죠.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그려온 그림동화를 보다가 제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을 발견했습니다.

가슴속 잿더미 속에 개미 손톱만큼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세한 불씨.

그 녀석이 어느새 제 우울을 먹이 삼아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걸 '글신이 내렸다'라고 한다지요.

억지로 쓰려할 때는 단 한 글자도 나가지 않더니,

무당이 신들려 칼춤을 추듯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였습니다.

제 이야기가 휴대폰 메모장 위로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가슴이 벅차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약 기운에 취해 쓰러지듯 잠들던 제가 새벽까지 탭을 붙들고 글을 써 내려갔습니다.


물론 문득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다시 무기력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면 어쩌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 뱀처럼 똬리를 틀더니 머릿속을 헤집고 기어 다닙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 그냥 지금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오늘 하루만 살자.

지금 이 순간만 버텨보는 거야.'


저는 우울증을 앓는 분들에게 감히 "당신도 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용기를 드릴 수도 없어요.

"너도 했는데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의 구호는 외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저 각자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자연스레 풀어지길 기다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엉킨 실타래를 억지로 잡아 뜯을 수 없듯이, 우울은 극복해야 할 과제나 풀어야 할 산수 숙제가 아니니까요.


다만 단 하나, 조심스레 권하고 싶은 건 있습니다.

병원에 가서 자신에게 맞는 약을 처방받아 보세요.

이 약이 안 맞으면 저 약도 먹어보면서요.

물론 압니다. 병원 갈 기력조차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을요.

그럴 땐 제발 주변의 누군가가 당신의 손을 잡고 억지로라도 데려가 주기를 바랍니다.

혼자 버티기엔 너무 힘든 싸움이니까요.


그냥 하루를 살아요, 우리.
한때 저는 달콤한 포도 젤리만 질겅질겅 씹으며 살이 찌고 턱관절이 아프도록 버텼습니다.

살쪄도 괜찮아요. 포도 젤리라도 먹으며 살아내세요.


"살쪄서 우울하다"는 분에게는 제가 해드릴 말이 없지만,

그저 생명만 유지하다 보면 각자의 시간에 어떤 내적 동기가 불쑥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때까지만 버텨봅시다.

아니, 버티고 싶지 않더라도 아주 조금만요...


힘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저 토닥토닥, 자신을 한번 안아주세요.

하찮아도 괜찮고,

괜찮지 않아도 정말 괜찮습니다.


저조차 지금 제가 괜찮은 건지,

일시적인 도파민의 장난인지 확신하지 못하는데 감히 누구를 위로하겠습니까.

확실한 건,

저도 여전히 길을 찾는 중이라는 것뿐입니다.


PS. 우울은 마음의 감기가 아닙니다. 그것만큼은 장담합니다.
저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침묵 대신, 기록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우울과 맺은 가장 느슨한 휴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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