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의 잔꾀와 은둔자의 딜레마

약속이 취소되길 기도하는 밤

by 숨나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를 들으며 나는 남몰래 펜을 들었습니다.

시적 허용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문법의 파괴, 내용의 불합리성, 낯 뜨거운 묘사까지 하나하나 분석하고 따졌습니다.


그때의 나는 몰랐습니다.

그 까탈스러운 태도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나만의 방어 방식이었다는 것을요.

쉽게 믿지 않고, 쉽게 감동하지 않고, 늘 한 발짝 물러서서 구조를 뜯어보는 습관.

그것은 감수성이 아니라 생존 기술에 가까웠습니다.


그 시선 덕분인지 훗날 출판사 편집부에서 밥벌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민한 편집자 밑에서 일하는 동료들은 꽤나 고달팠겠지만, 일 밖에서의 나는 제법 괜찮은 동료였습니다.

술도 잘 마시고 영화도 보러 다니며 적당히 ‘순한 사람’으로 자신을 잘 포장하며 살았으니까요.


여기까지는 비교적 무해한 이야기입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사교성, 최소한의 유머, 최소한의 호감도.

나는 그것을 정확히 계산해 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순함’이 결코 진짜 내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실상의 나는 삼국지의 조조에 가깝습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수를 읽는 잔꾀 18단의 소유자죠.


젊었을 땐 그 잔꾀로 세상을 유쾌하게 건너왔는데,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무서워집니다.

조조는 영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끝내 신뢰받지 못한 인물이었습니다.

계산이 빠른 사람은 오래 살지만, 오래 사랑받지는 못하니까요.


나 역시 그 사실을 점점 체감하게 됩니다.

눈치가 빠른 만큼 상처도 빠르게 입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다음 수를 미리 읽어버리는 사람은 결국 관계 안에서 늘 먼저 지칩니다.


나는 가식을 잘 떨지 못합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눈조차 마주치기 힘들어 조용히 거리를 둡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앞에서는 박수를 치고 뒤에서는 하지도 않은 말과 행동을 지어내어 칼을 꽂는 이들이 있더군요.

그런 거짓의 파도에 몇 번 휩쓸리고 나니 사람에 대한 오만정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생리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앞선 장들을 떠올립니다.

아쉬운 사람이 관계를 기억하고, 덜 필요한 사람이 먼저 떠난다는 사실. 분노는 결국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고, 우리는 ‘각자의 사정’이라는 말로 서로의 비겁함을 덮어줍니다.

그 모든 장면 속에서 나는 늘 관찰자였고, 피해자였고, 동시에 방관자였습니다.


좁디좁은 호주 이민 사회에서 정보라도 얻으려면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데, 지난 3년의 은둔 생활을 거치고 나니 그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민 사회는 작고, 소문은 빠르고, 평판은 쉽게 왜곡됩니다.

한 번 잘못 엮이면 빠져나오기 힘든 구조라는 걸 나는 이미 몇 차례 학습했습니다.


그래서 더 조심했고, 더 계산했고, 더 멀어졌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다치지 않는다는, 너무나 단순하고 비겁한 결론에 도달한 셈입니다.


가끔 소소하고도 시답잖은 농담이 그리워 사람을 만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호탕하게 수다를 떨고 웃음판을 주도합니다.

‘조조의 가면’이 여전히 건재한 탓일까요.


이 가면은 참 편리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외향적이라고 착각하고, 인간관계를 좋아한다고 오해합니다.

아무도 묻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잘 웃는 사람이, 다음 약속을 먼저 잡지 않는지에 대해서는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어쩌다 약속이 잡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한 기도가 시작됩니다.


‘제발, 약속 좀 취소돼라.’


이 문장은 웃자고 쓸 수 있는 농담 같지만, 실은 꽤 잔인한 고백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 존재해야 할 ‘나’라는 역할이 너무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사람처럼 말하고,

적당히 공감하고,

너무 솔직하지 않게 선을 지키는 일.

그 모든 연기가 시작되기 전, 나는 늘 도망칠 구멍을 찾습니다.

신발 끈을 묶기 직전까지 이 불발의 행운을 기다리는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요.


이건 게으름도, 오만도 아닙니다.

이미 여러 번 다쳐본 사람이 몸을 움츠리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싫어해서 피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외롭고, 반갑고, 동시에 너무나 피곤한 마음.

그 모든 감정이 뒤엉켜, 나는 그저 소파에 처박혀 무사히 하루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나는 결코 냉소적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단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였습니다.

사람을 향한 경계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너무나 쉽게 무너지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작은 전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 이유를 곰곰이 깨닫습니다.

나는 내가 조조처럼 계산적이고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마다, 나는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문제는 타인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든 속아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내 얇은 귀와,

속절없이 흔들리는 내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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