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말하자면... 불행한 가족사
“어머, 시로짱이네. 볼 좀 봐, 꼭 찹쌀떡 같아.”
누군가 내 통통한 볼을 손가락 끝으로 살짝 건드리며 웃었다.
‘시로(白)’.
하얗다는 뜻의 그 일본어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는 온 세상이 나를 환대하고 있다는 묘한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나는 일부러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어 더 불룩하게 내밀며 배시시 웃었다.
그 시절의 나는 어른들의 미소가 투명한 유리막처럼 언제까지나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부서지기 쉬운 그 유리막 너머로 거대한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땅 위가 아니라 하늘 위, 차가운 구름 냄새가 감도는 기내에서 시작된다.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은 나는 두 다리를 덜컥거리며 허공을 찼다. 작은 운동화 끝이 앞 좌석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릴 때마다 기분 좋은 진동이 몸을 타고 흘렀다. 창밖에는 몽실몽실하고 포동포동한 뭉게구름들이 지평선 끝까지 군단처럼 이어져 있었다. 네 살짜리 눈에 비친 그것은 거대한 솜사탕 무덤이거나, 혹은 신들이 숨겨놓은 푹신한 침대 같았다.
“엄마, 저기 봐. 솜사탕이야! 가방에 있는 빨간 사탕 꺼내줘. 저 솜사탕 구름 찍어 먹게.”
내 들뜬 목소리에 엄마는 즉각 응답하지 않았다. 엄마의 시선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창밖의 절경이 아니라, 굳게 닫힌 기내의 어둠 어딘가, 혹은 자신의 발등 위에 머물러 있었다. 엄마의 옆모습은 마치 정교하게 깎아놓은 석고상처럼 창백하고 정지되어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엄마는 무거운 늪에서 손을 건져 올리듯 가방 속을 더듬어 작은 사과 모양의 빨간 사탕 하나를 꺼내 주었다. 나는 그것을 소중한 보물처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꼭 쥔 채 창밖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끝에 닿을 듯 일렁이는 하얀 덩어리들. 정말로 사탕 끝에 그 달콤한 구름을 푹 찍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아 팔에 힘을 잔뜩 주었다.
하지만 그 작은 공간 안을 채우고 있던 공기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내 손을 스치는 엄마의 손끝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고, 아빠는 창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화석처럼 굳어 있었다. 기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운이 감돌았다. 코끝이 아릴 만큼 서늘한 금속 냄새. 나는 그것이 평소와 다른 순간이라는 것을 온몸의 감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네 살의 언어로는 그 공포를 무엇이라 부를 수 없었다.
스피커에서 기장의 목소리가 찢어지는 잡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이제 곧 제주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모두 좌석벨트를 단단히 매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딩’ 소리와 함께 평화롭던 기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손이 분주해졌고, 승무원들의 구두 소리가 복도를 두드렸다. 엄마는 내 어깨 위로 안전벨트를 꽉 조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제 내려야 해. 여기가 우리가 살 곳이야.”
비행기가 크게 휘청였다.
쿵—
기체가 땅을 치는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내 작은 몸이 허공으로 툭 튀어 올랐다. 그 찰나의 순간, 손바닥에 밴 땀 때문에 미끄러워진 빨간 사탕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톡, 또르르—.
사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의자 밑의 깊은 어둠 속으로 굴러 들어갔다. 방금까지 쥐고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숙여 사탕을 찾으려 하자, 엄마가 단단한 쇠 갈고리 같은 손으로 내 팔을 낚아챘다.
“괜찮아. 다음에 사 줄게. 지금은 그냥 둬.”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눈동자는 여전히 목적지 없는 먼 곳을 향해 방황하고 있었다. 아빠는 한동안 묵묵히 창밖만 바라보다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어깨를 떨었다. 그 어깨 떨림마저도 어린 나에게는 얼음처럼 차갑고 무거운 기운으로 느껴졌다.
다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을 때, 더 이상 그곳에 솜사탕은 없었다.
하얀 구름 대신 낯선 땅의 흐릿한 빛과 황토색 바람이 창문을 때리며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꾹 참았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햇살은 부드럽게 내리쬐었지만 공기는 냉랭했고, 낯선 땅의 냄새가 코 안을 간질이며 지나갔다.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 눅눅한 흙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뒤섞인 체취까지. 내 작은 몸은 한순간 얼어붙은 것 같았다.
엄마는 내 손을 단단히 잡았다.
“시로짱, 조심해.”
그 말에 나는 비로소 조금 안심했다. 구름 위의 달콤함은 사라졌지만, 적어도 엄마의 손은 차갑고도 단단하게 내 곁에 있었다.
공항 로비 안은 낮은 천장의 형광등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발아래 대리석 바닥은 차갑고 매끄러워, 내 작은 운동화 밑창에 냉기가 스며들었다. 어린 나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한 발 한 발 땅을 디디는 순간이 긴장과 설렘으로 이어졌다.
낯선 말투, 낯선 억양, 제주 사투리가 귀를 스쳤다.
“어디서 와수꽈?”
“야이 잘도 아꼽다예.”
그 차이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던 나는, 그저 모든 것이 낯설고 어지럽고 조금 무서웠다. 하지만 손을 꼭 쥔 엄마의 온기가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손바닥에 남아 있는 빨간 사탕의 감각을 떠올렸다.
다시는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낯선 바람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숨을 깊이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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