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말하자면... 불행한 가족사
제주에 도착한 뒤, 나는 한동안 아빠라는 광활한 우주 안에서 가장 눈부신 별이었다.
언니들이 학교로 가면, 나는 아빠를 독차지했다.
제주의 거친 바람이 문틈 사이로 끈질기게 밀려와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도, 아빠의 두툼한 품 안으로 파고들면 세상은 금세 고요해졌다.
아빠는 일본말로 재잘대는 내 작은 입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며, 나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낯선 말들을 하나씩 가르쳤다.
“시로짱, ‘아빠’ 해봐. 아-빠.”
혀끝이 짧게 굴러 ‘빠빠’가 되면, 아빠는 허허 웃으며 “기여, 내새끼 잘했져!” 하고 볼을 문지르곤 했다.
제주 바람에 실려 온 습기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뒤섞여 세상 모든 근심을 잠재우는 것 같았다.
“배고파!” 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상이 차려졌고,
“졸려!” 하면 아빠의 넓고 평평한 등은 나의 안락한 침대가 되었다.
“싫어!”라는 제멋대로 투정에도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무조건적인 사랑과, 껄끄러운 수염의 감촉뿐이었다.
다섯 살 무렵, 나는 핑크색 토끼 가방을 들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이거 너무 거추장스러워. 잘라줘!”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낡은 서랍에서 묵직한 무쇠 가위를 꺼냈다.
싹둑—
무심한 소리 한 번에 토끼의 가느다란 줄이 두 동강 났다.
나는 자유로워진 가방만 흔들며 환하게 웃었다.
“이제 좋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아빠는 낮게 중얼거렸다.
“무사, 이 가방 줄은 잘라달랜 햄신지….”
(왜 이 가방 줄은 잘라달라고 하는지….)
목소리에는 당혹과 무력한 애정이 섞여 있었다.
며칠 뒤, 나는 바닥에 뒹구는 흉물스러운 줄을 들고 다시 울며 매달렸다.
“아빠, 또 달아줘! 어서!”
아빠는 안경을 꺼내 코끝에 걸고 낡은 궤짝에서 바늘과 하얀 무명실을 꺼냈다. 바늘이 질긴 가죽을 뚫을 때마다 아빠의 무거운 숨소리가 방 안의 적막을 채웠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 서툰 복원을 지켜보았다. 그 모습은 붕괴된 세계를 간신히 기워내는 성자의 뒷모습 같았다.
“자, 이제 달았져. 봐, 좀 괜찮지?”
손에 돌아온 토끼 가방은 예전보다 덜 예뻤다.
하지만 그 투박한 자국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 상처 입은 매듭이,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줄이라는 것을 그때 어렴풋이 알았다.
그 후, 아빠와 나는 또 다른 놀이에 빠졌다.
수수깡으로 기린을 만들려 했는데, 집에는 아이들용 안전 칼이 없었다. 아빠는 부엌에서 시퍼런 식칼을 가져왔다.
“내가 할 거야! 혼자 할 수 있어!”
“이로코롬 심으라게. 아빠가 도와주켜.”
(이렇게 잡아. 아빠가 도와줄게.)
순간, 칼날이 내 엄지손가락 끝을 스쳤다.
손톱 아래 살이 잘렸고 온몸의 피가 손가락 끝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게 느껴졌다.
아빠는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방 안은 얼어붙었다.
비상약이 없어서 그랬는지, 민간요법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빠는 담배 가루를 나의 손끝 위에 올려 조심스레 눌러주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팔 우로 올령 이시라. 피 안 나오게.”
(팔 위로 올리고 있어.)
벽에 기대 한쪽 팔을 올리고 있는데 화장지로 감싼 엄지손가락 끝에서 두근두근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때 나는 알았다. 사랑은 서툴고, 때로는 위험한 방식으로 건네질 수 있다는 것을.
노란 수수깡 기린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나는 배웠다.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아빠의 품 안에서도 다칠 수 있다는 걸, 그럼에도 사랑은 이어진다는 걸.
엄마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고, 우리 집의 축이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삐뚤빼뚤 흉터 난 토끼 가방을 품에 안고 웃었다.
빨간 사탕을 잃어버렸던 텅 빈 손바닥 위에는 아빠의 하얀 실과 담배 가루가 훈장처럼 남았다.
나의 낙원은, 아빠의 서툰 바느질 자국을 따라 천천히 저물어가고 있었다.
밤이 깊으면 거실에서는 부스럭거리며 여전히 무언가를 꿰매는 소리가 들렸다.
찢어진 옷, 코 빠진 양말, 끊어진 가방 끈….
필사적으로 가족의 형태를 유지하려던 그 소리는 집 안의 적막을 채웠다.
핑크색 토끼 귀 위 하얀 실처럼, 내 어린 시절 기억 위에도 아빠가 남긴 투박한 보호의 흔적이 흉터처럼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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