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나의 숨 트멍] 아홉 번째 구멍

유령오빠와 책상 밑의 숨바꼭질

by 숨나

“숨나야— 숨나야—!”

저 멀리서 아이들이 달려오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때는 국민학교 4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확인이라도 하듯, 천진한 얼굴로 내 앞에 멈춰 섰다.

“야, 너네 오빠 말 못한다며? 벙어리라던데?”

그 순간, 내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으며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얘졌다.

“어? 나 오빠 없는데… 나 언니 둘에 남동생 하나야.”

“아, 그래? 우리가 잘못 알았나 봐.”

그날 이후로 누군가 가족을 물으면 나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딸 셋에 아들 하나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던 세상 안에서는 그랬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는 부모님, 그 뒤를 따르는 세 자매, 그리고 귀여운 막내아들.
남들이 보기에 우리 가족은 수채화처럼 맑고 평범한 가족이었다. 금슬 좋은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고 자란 막내딸. 사람들은 내 명랑한 얼굴에서 그런 배경을 자연스럽게 읽어냈다.

…는 개뿔.

내게는 오빠가 있었다.
아니, 오빠가 있었는데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오빠가 있으면서도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대학 시절, 허름한 선술집에서 소주 세 병의 힘을 빌려 한 선배에게 이 무거운 가족사를 토해내기 전까지 내 삶에서 ‘오빠’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였다.

내 오빠는 장애인이었다.
아니, ‘장애인이었다’는 과거형조차 이제는 사치다.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오빠가 죽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오빠가 있었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산 자보다 죽은 자가 차라리 부정하기 쉬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야 그 지독한 비밀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일까.

그런데도 여전히 문득문득 아쉬운 쪽은 나였다. 살아 있을 땐 지우고 싶어 안달복달했던 그 존재가, 모래성처럼 무너져 사라진 지금에야 비로소 내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았다.

부모님은 원래 딸 하나, 아들 하나면 충분하다 생각하셨다고 한다. 아빠가 가난한 시골의 팔 형제 중 장남이었던 탓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살이던 아기가 아장아장 걷다 그만 이층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크게 다쳤고, 그 사고는 오빠의 시간을 멈춰 세웠다.

사실 말하자면… 작은언니와 나는 남동생을 낳기 위해 어쩌다 생긴 징검다리 같은 존재, 즉 떨거지들이었다는 것을 남존여비사상을 배우고 난 후 알게 되었다.

오빠의 지능은 세 살 무렵에 머물렀다. 말을 하지 못했고 소리로만 의사를 표현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마구 때렸다.
불쌍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무섭기도 했다.
오빠는 화장실은 갈 수 있었지만 뒤처리를 하지 못했다. 변이 묻은 채로 속옷을 그대로 입었고 그 안에서 굳은 변이 가끔 방 안을 굴러다니기도 했다.
냉장고 문을 활짝 열어 안의 음식을 모조리 꺼내 먹고 헤집었고, 장판 위에 침을 뱉고 손으로 문지르며 놀았다.
그래서 오빠가 자던 방에는 늘 역한 침 냄새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오빠를 내 가족에서 제외해 버렸다.
오빠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너무 아파서 차라리 잘라내고 싶을 만큼.
어떤 날은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끔찍한 생각까지 해버리고는 스스로가 너무 역겹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일본에 있을 때는 치료도 열심히 받았고 일반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다녔다. 거기서는 차별없이 모두가 따뜻했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뒤, 아빠는 그때를 생각하며 오빠의 손을 잡고 국민학교 문턱까지 갔다가 말없이 되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오빠는 집 안에 방치되었고, 형편이 조금 나아진 뒤에야 장애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오후 네 시,
장애인 학교 버스가 소방서 앞에 멈췄다.
일하러 간 부모님은 나에게 늘 같은 심부름을 시켰다.

“오빠 데리러 갔다 오라이. 늦지 말앙 가고이.”

(오빠 데리러 갔다 와. 늦지 말고 가.)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다.
나는 앞서 가고 오빠는 뒤따라왔다. 그러다 똥이 마려우면 길에 쌌고, 오줌이 마려우면 그대로 쌌다.
수치를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오빠의 행동 앞에서 부끄러움은 언제나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날,

아이들이 오빠를 두고 수군거렸던 그날 이후 나는 숨기 시작했다. 뒷방 책상 밑으로 몸을 밀어 넣고 숨을 죽였다.
집에 없는 척, 세상에서 사라진 척.
동네 슈퍼를 하던 이모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불렀다.

“숨나야— 숨나야— 명이 데리러 가야 하는디, 야이 어딜 가시냐?”
(명이 데리러 가야 하는데, 얘가 어딜 갔지?)


현관에 울리는 발소리에 나는 더 깊숙이 몸을 우겨넣고 의자로 내 몸을 가렸다.
그렇게 나는 숨는 쪽을 선택했고, 오빠를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우리 가족 안에서 그를 유령처럼 방치했다.

이게, 내가 숨었던 이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나의 슬프고도 불행한 가족사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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