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나의 숨 트멍] 두 번째 구멍

핑크색 토끼와 하얀 실의 온도

by 숨나

제주에 도착한 뒤에도 한동안 나는 아빠의 우주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일본말로 쉴 새 없이 조잘대는 내 입술이 예쁘다며 아빠는 나를 곁에 끼고 한글을 가르쳤고, 막내딸의 말도 안 되는 투정은 아빠의 법도 아래 모두 허용되었다.


네 살 무렵의 어느 날,
나는 핑크색 털뭉치 토끼 핸드백을 들고 아빠에게 달려갔다.
“아빠, 이거 줄 잘라줘. 거추장스러워."


아빠는 군말 없이 가위를 가져와 예쁜 핑크색 줄을 싹둑 잘라주었다.
하지만 아이의 변덕은 날씨보다 빨랐다.
며칠 뒤, 나는 잘린 줄을 들고 다시 아빠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이거 다시 달아줘.
어서 달아달란 말이야. “


이미 한 번의 가위질로 생명을 다한 줄이었다.
그런데도 아빠는 화를 내지 않았다.
투박한 손으로 바늘과 하얀 실을 찾아와 안경을 고쳐 쓰고, 한 땀 한 땀 줄을 꿰매기 시작했다.
삐뚤삐뚤 이어진 그 하얀 실은 끊어진 줄을 잇는 것이 아니라 내 고집을 받아주는 아빠의 방식 같았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무엇이든 잘라달라면 잘라주고, 다시 이어달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꿰매주던 그 다정한 손이 훗날 우리 가족의 가난과 엄마의 비극 앞에서는 왜 그렇게 오래 떨고만 있었는지.


핑크색 토끼 귀 위에 남은 삐뚤한 하얀 실의 흔적.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가장 따뜻한 온도였고, 곧 태어날 남동생에게 내 자리를 내어주기 전 마지막으로 누렸던 왕관의 무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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