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힘 : 소녀가장의 가출

by 숨나

아빠는 팔형제 중 장남이자 종손이었다.
엄마는 빠듯한 살림에도 작은아빠들과 고모들을 줄줄이 결혼시켰고, 일 년에 열 번도 넘는 제사와 명절을 말없이 치러냈다.


명절 때면 사촌 동생들은 우리 집 오징어튀김이 제일 맛있다고 조잘댔다. 나는 그 천진한 입을 손으로 탁 치고 싶었다. 하루 종일 기름 냄새에 찌든 채 엄마 옆을 지켜야 했던 나는, 지금도 오징어튀김을 좋아하지 않는다.


엄마가 죽고 나서, 그 거대한 의무는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작은엄마들이 거들긴 했지만 장을 보고, 돈을 계산하고, 전을 부치고, 뒷수습을 하는 모든 일은 내 손을 거쳐야 했다.
도망치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시간이었다.


큰언니는 여전히 타지를 떠돌았고,

작은언니는—원래도 살림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직장 생활 6개월 만에 임신과 결혼으로 집을 떠났다.
의무와 책임이 늘어날수록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은 점점 더 조급해졌다.
내가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은 ‘취직’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딱 백만 원을 챙겨 서울로 올라갔다.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는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는 갈망이 낯선 도시의 두려움보다 컸다.


낡은 자취방에서 쥐가 갉아먹은 비누를 발견하고, 매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나는 괜찮았다.
적어도 그곳에는 내가 차려야 할 밥상도, 제사상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하는 건 늘 나였다.

“이거 막 비싼 거 아니라? 숨나는 잘도 착해이. 식게영 멩질이영 때마다 서울서 내려왕 식게상, 차례상도 초리고, 조근 어멍들 선물도 챙겨오고이. 막 요망지게 잘살암서.”
(이거 엄청 비싼 거 아니야? 숨나는 참 착해. 제사랑 명절 때마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제사상, 차례상도 차리고, 작은엄마들 선물도 챙겨오고. 참 야무지게 잘 살고 있네.)


친척들의 칭찬은 내 마음에 가시처럼 내려앉았다.
서울로 도망쳐도 집안일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제사는 때마다 돌아왔고, 명절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왔다.

서울은, 제주에서 너무 가까웠다.

상경한 지 일곱 해가 지나 10월의 마지막 날,

나는 더 멀리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구름 위, 바다 건너 타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아무 역할도 맡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제는 자유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단정하지는 못했다.
다만 창밖으로 펼쳐진 바다가 내 어깨 위에 얹혀 있던 것들을 하나씩 느슨하게 풀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숨 막히게 하던 세계로부터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나왔다.
그게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조용한 가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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