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공부는 '나'를 기록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퇴직 후 3년 차에 접어들 무렵, 무채색이었던 나의 일상에 작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연히 알고리즘이 나를 이끈 곳은 유튜브 채널 '김교수의 세가지'였다. 평소 인생의 방향성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품고 있던 묵직한 고민들을 명쾌한 논리와 따뜻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영상들이 내 시선을 강렬하게 붙들었다. 그러던 중 김교수님이 운영하는 아이캔유니버스에서 AI 시대에 발맞춘 'AI 기록학' 이라는 커리큘럼을 런칭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인공지능과 기록이라는, 이질적이면서도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조합에 이끌려 나는 2025년 9월, 앞뒤 재지 않고 그 길에 발을 들였다.
20년 넘게 IT 업계에서 몸담아온 나로서는 내심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있었다. '기술적인 AI라면 내가 좀 알지, 기록이라고 해봐야 그저 메모하고 정리하는 수준 아닐까' 하는 가벼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자 나의 오만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곳에는 차가운 알고리즘이나 이진법의 코드보다 훨씬 깊은 '인간'에 대한 예우와 '삶'을 향한 철학이 흐르고 있었다. 기록이라는 분야가 학문으로서 당당히 존재한다는 사실부터가 신선한 충격이었고, 기록을 통해 삶을 새로이 정의하고 바라보는 접근법은 생소하면서도 깊은 울림과 믿음을 주었다.
강의 하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살았던 '어른 공부'의 정수였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근력이 필수적이듯, 흔들리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근력이 필요함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기록학은 바로 그 삶의 근력을 키우는 훈련이었으며, 기록이라는 도구로 나다운 삶을 복원해가는 과정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손에는 늘 다이어리가 들려 있었고, 매일의 정직한 기록을 통해 나의 하루하루는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고 단단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강의 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기록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했던 첫 수업이었다.
기록이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박제나 기억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나의 삶을 나답게 빚어내는 가장 강력한 창조적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기록을 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흩어지는 찰나의 영감과 일상을 붙잡아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기르기 위함이며, 나아가 인생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타인이 휘두르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직접 키를 잡는 '주관자적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함이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는 힘"이라는 교수님의 문장은 한동안 내 가슴속에서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며 나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내가 AI 기록학에 매료되어 미래의 꿈을 구체화한 과정은 앤절라 더크워스가 말한 '그릿(Grit)'의 첫 번째 자산인 '관심(Interest)'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는 열정이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계시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관심에서 시작해 지속적인 탐색과 심화 과정을 거쳐 키워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IT 경력자로서 가졌던 기술적 호기심이 기록학이라는 실천적 학문과 만나 '지속적인 관심'으로 진화했고, 그것이 열정이라는 엔진에 불을 붙인 것이다.
특히 나를 움직인 동력은 '자기성찰'이라는 치열한 과정이었다. 기록을 통해 어지러운 과거를 정리하고 모호한 현재를 직시하자, 비로소 미래의 꿈을 그려볼 수 있는 최소한의 엄두가 났다. 삶에는 반드시 나침반 역할을 할 '인생 지도'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늘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산처럼 어렵고 막막하게만 느껴져 뒤로 미뤄왔던 숙제였다.
나는 수업을 통해 얻은 용기로 시간에 시간을 들여 '5년 후 꿈 포트폴리오'와 '비전 선언문'을 한 땀 한 땀 작성해 나갔다. 이 과정은 내 깊은 곳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내가 진짜 도달하고 싶은 '최상위 목표'가 어디인지를 확인하는 신비롭고도 고달픈 경험이었다.
그릿의 핵심은 단순히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과 끈기'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 열정은 나만의 만족을 넘어 타인에게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과 결합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나의 꿈은 처음부터 거창한 이타심이나 사명감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오로지 길을 잃은 나를 찾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기록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성찰의 끝에는 타인이라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릿을 읽으며 나의 개인적인 성취와 성장이 결국 타인에게 기여하는 '타자공헌'의 단계와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을 때, 감출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이는 내 공부가 개인의 만족을 넘어 세상과 따뜻하게 연결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나는 기록을 통해 내가 매일 읽고 쓰고 명상하는 사람이며, 동시에 삶을 축제처럼 향유하고 자신의 일상을 큐레이션 하는 존재임을 정의했다. 나는 5년 후, 내가 얻은 통찰과 숙련을 통해 길을 잃고 방황하는 타인의 마음을 치유하고 돕는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터'가 되겠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웠다. 내 삶을 큐레이션 하듯, 타인의 삶 속에 숨겨진 보석 같은 순간들을 찾아내어 다시 빛나게 해주고 싶다는 작은 씨앗을 품기 시작했다.
*참고
여기서 큐레이션(Curation)이란 본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작품을 수집하고 관리하며 전시하는 행위를 뜻하지만, 이제는 넘쳐나는 정보와 무의미한 일상의 파편 속에서 가치 있는 것들을 선별하여 새로운 의미와 맥락을 부여하는 라이프스타일의 핵심 기술로 확장된 의미를 가짐.
50대 중반, 우리는 이미 세상의 거친 풍파를 겪으며 이치를 다 안다고 생각하기 쉬운 나이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야 비로소 인생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기 시작한 '걸음마를 뗀 어른'임을 담담히 고백한다. 뒤늦게 시작한 이 공부가 나를 다시 뜨거운 출발선 앞에 세웠고, 그곳에서 느끼는 가슴 뜀은 20대 시절의 풋풋한 설렘보다 훨씬 묵직하고 뜨거운 무게를 지니고 있다.
인생 지도를 그리는 일을 너무 어렵거나 거창하게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금 자신의 마음을 아주 잠깐이라도 머물게 하는 작은 '관심'부터 하나씩 기록해 보길 바란다. 그 사소한 기록들이 겹겹이 쌓여 당신의 비전이 되고, 5년 후의 단단한 포트폴리오가 될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향기를 지닌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 정의하는 순간,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나만의 축제'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 앞에서는 누구나 아이처럼 두렵다.
나 역시 매일 설렘과 두려움이라는 양가적인 감정 사이를 격렬하게 오가는 중이다. 출발선에 선 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의문과 회의가 소용돌이친다. '이 꿈이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가다가 지쳐서 내가 먼저 포기하면 어쩌나?', '지금 시작하기엔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들이 엉겨 붙어 나를 흔든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가만히 멈춰 서서 숨을 크게 들이쉰다.
이 요동치는 불안한 감정은 내가 제자리에 멈춰 있지 않고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를 가두는 차가운 공포가 아니라, 다시 뛰기 시작한 내 심장의 건강하고 뜨거운 고동소리임을 이제는 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위로해야 할 타이밍임을 아는 순간, 두려움은 나를 앞으로 밀어주는 동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