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헤이즐넛

씹지 못해도 좋아했던 맛, 후각으로 남은 기억

by Journey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
물 하나랑 쓰레기봉투. 그 정도만 사려고 했다.


계산대로 가는 길에 온장고가 있었다. 겨울이면 늘 그 자리에 있는, 따뜻한 캔커피들이 줄 서 있는 작은 유리문. 나는 원래 거길 잘 안 봤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시선이 한 번 걸렸다.


‘헤이즐넛.’


캔 표면에 크게 박힌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디자인도 아닌데, 그 글자만 유난히 또렷했다. 나는 한참을 서 있다가, 이유도 없이 그 캔을 집어 들었다. 따뜻했다. 손바닥에 온기가 남았다.

봉투에 넣고 나와, 편의점 문을 밀고 밖으로 한 발 나서는 순간에야 나는 커피 뚜껑을 땄다.

치익- 탁


그제야 냄새가 올라왔다. 매장 안에선 없던 냄새.
달달하고 인공적인, 그런데 이상하게도 너무 익숙한 향.


아버지 냄새였다.


아버지는 원래 차를 좋아했다.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처럼 “산미” “바디감” 같은 걸 따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향’은 대개 차 쪽이었다. 보리차처럼 구수한 것, 둥굴레차처럼 은근한 것, 가끔은 생강차처럼 목이 확 풀리는 것.


아버지는 혼자서도 차를 자주 타 먹었다.
부엌에서 컵을 꺼내고, 티백 하나 꺼내고, 물을 붓고... 그게 별일도 아닌데 그 시간만큼은 집이 잠깐 조용해졌다. 아버지도 조용해졌다. 따뜻한 무언가를 천천히 마시는 방식. 씹어 삼키는 게 아니라 목으로 흘려보내는 방식. 아버지는 늘 그렇게 하루를 정리했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것도 아버지답게, 커피를 커피로 마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커피를 항상 물처럼 연하게 탔다.
정말 ‘물커피’라는 말이 딱 맞았다. 작은 머그가 아니라 큰 컵을 꺼내서, 봉지 하나를 다 넣는 법이 없었다. 대충 반. 어떤 날은 3분의 1. 손목 스냅도 없고, 계량도 없고, 그냥... 오래 해본 사람처럼.


“이 정도면 된다.”


그렇게 타놓고도 더 붓는다. 물을... 또 물을...
색이 갈색이 아니라 약한 미숫가루색이 될 때까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거의 차잖아. 커피가 아니라.


“아빠, 그럼 커피 맛있어?”


내가 물으면 아버지는 꼭 똑같이 말했다.


“쓴 거 싫다. 물처럼 마셔야지.”


그 말이 참 아버지다웠다.
진하게 즐기는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굳이 진해질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 뭐든 적당히 희석해서, 부담 안 가는 쪽으로.


그런데 그 연한 커피들 중에서도 아버지가 유난히 찾는 게 하나 있었다.
헤이즐넛.


어느 날 아버지가 툭 말했다.


“나는 커피 중엔 헤이즐넛이 제일 좋더라.”

“왜 하필 헤이즐넛?”


내가 물었나, 어머니나 누나가 물었나. 그것도 희미하다.
아버지는 대답을 길게 하지 않았다. 늘 그랬다. 이유를 설명하는 건 아버지의 언어가 아니었다. 대신 그때 아버지는 컵을 한 번 들어 코 가까이 가져가더니,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읍.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늘 믹스만 마신 건 또 아니었다.
어떤 날은 믹스커피를 타고, 어떤 날은 원두를 사 왔다. 원두를 ‘직접’ 샀다기보다는... 동네에서 갈아 놓은 가루를 봉지째 들고 와서는 조심스럽게 묶어두는 식이었다. 냉장고 안쪽 칸에 넣어두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가끔 커피를 사 오기도 했다.

아버지가 출장 얘기를 길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그럴 때는 가방에서 낯선 포장 하나를 꺼내 식탁에 툭 올려두곤 했다. 외국 글자가 적힌 봉지. 종이가 빳빳하고 색이 어두워서 괜히 ‘비싼 것’ 같아 보이는 그런 거.


그중 한 번은 타 먹는 방식이 좀 특이한 커피도 있었다. 지금은 티백형식이 많이 있지만 옛날에는 그런게 특히해보였다. 아님 내가 그때는 몰랐거나......
티백처럼 얇은 종이 봉지가 있는데, 컵 위에 걸 수 있게 작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그걸 컵에 걸어놓고 물을 확 붓지 않았다. 조금 붓고, 잠깐 기다리고, 또 조금 붓고... 그러다 멈추고. 차 우려내듯이.
나는 옆에서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설명을 안 했다. 다만 한 마디만.


“이게... 이렇게 마시는 거래.”


근데 결국 그 커피도 아버지 방식으로 끝났다.
다 우려놓고도 물을 더 붓는다. 더. 더.
특이한 커피도, 비싼 커피도, 아버지 손에 들어가면 결국 ‘향만 남는 정도’가 됐다. 그게 이상하게도 더 아버지 같았다.


헤이즐넛 향은 항상 집에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게 더 이상했다. 늘 풍기고 다닌 냄새가 아니라서, 가끔 남는 냄새가 더 선명했다.


예를 들면 이런 때였다.
새벽에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부엌에서 물을 끓일 때. 전기포트가 ‘탁’ 하고 끊기고, 컵에 뭔가를 털어 넣고, 숟가락이 유리벽에 ‘딸깍’ 부딪히는 소리. 그 소리가 나면 잠결에도 나는 알았다. 아버지가 깼구나.


그리고 잠시 뒤, 거실까지 아주 은은하게 흘러오는 달큰한 향.
진한 커피 향이 아니라, 누군가 과자를 뜯었나 싶은 그런 향. 헤이즐넛은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늘 그렇게 조용히 왔다.


가끔은 아버지가 외출하고 나서도 향이 남았다.
부엌 수건에...

식탁 의자에...

아버지 점퍼의 소매에...
있다가 없다가 하는 향.
그래서 더 기억에 걸렸다.


장례가 끝나고, 나는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갔다.
수목장 쪽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나무들이 빽빽한데도 소리는 적었다. 발밑 낙엽이 바삭거리는 소리만 또렷했다.


나는 헤이즐넛 캔커피 하나를 들고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뜬금없었다.

장례 치르고 며칠 뒤에 커피 한 캔 들고 와서 뭘 하겠다고...

아버지는 이제 마시지도 못하는데...
그래도 손이 그렇게 했다. 손은 마음보다 먼저 움직일 때가 있다.


나무 아래에 서서, 나는 캔을 열었다.


치익- 탁


그 소리가 숲에서는 더 크게 들렸다. 괜히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누가 들을까 봐. 이런 것도 눈치 보는 내가 싫었다. 그런데 어쩌겠나 늘 그랬다.


뚜껑을 열자마자 달큰한 향이 확 올라왔다.
바람에 금방 흩어졌다가, 잠깐 다시 돌아왔다.

나는 캔을 나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예전 병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 코앞에 대는 것처럼.


“아빠... 이거...”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드세요’ 같은 말을 붙이면 이상할 것 같았다. 아버지는 평생 그런 말 들으면 더 민망해하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캔을 잠깐 땅에 내려놓았다.
며칠 전에 쌓여있던 눈 위에...

아주 조심히...

넘어지지 않게...
그리고 한참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 정확히는 말이 너무 많아서 한 마디도 안 나왔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늘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처럼 어중간하게 목에 걸리고 끝났다.


나는 결국 캔을 다시 집어 들고, 아주 작은 한 모금만 마셨다.
아버지가 늘 하던 것처럼, 물처럼 마셔보려고.
근데 실패했다. 캔커피는 아무리 조심해도 달고 진했다.


“아...”


그 한 모금이 목으로 넘어갈 때, 나는 갑자기 숨이 가빠졌다.
아버지는 이걸 얼마나 연하게 타서 마셨던 걸까. 쓸 것도 달 것도, 너무 진한 건 다 부담스러워서. 그냥 조금씩만, 괜찮은 정도만.


나는 캔을 열어둔 채로 나무 아래에 잠깐 놓았다.
향이 조금이라도 더 남아 있길 바라면서...

사실은 누가 치울지도 모르고, 바람에 넘어질지도 모르고, 금방 식어버릴지도 모른다.
다 알지만 그날은 그런 걸 따지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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