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튤립

왜 그 꽃이었는지, 이제야 떠오르는 이유

by Journey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며칠 동안은, 이상하게도 어떤 단어가 자꾸 입안에 맴돌았다.
그 단어를 꺼내 말하면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일부러 삼켰다.
그래도 혀끝에 붙었다가, 목구멍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식으로 계속 올라왔다.


튤립


집에 튤립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아버지가 화분을 키우던 사람도 아니었다.
꽃은 더더욱. 아버지 같은 사람이 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솔직히 좀 어색하다.
우리 집에서 예쁘다는 말은 대개 TV 광고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이었고,

생활 속에선 늘

"돈 아깝다"

"쓸데없다"

"그거 사느니 밥이나"가 먼저였다.


그런데도 마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굳이 꺼내지 않아도 됐던, 어떤 숨겨둔 서랍이 장례 이후 갑자기 덜컥 열려버린 것처럼 튤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기억이 처음 닿은 건 에버랜드였다.

에버랜드 튤립축제.
그때 내가 정확히 몇 살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초등학생이었을 수도 있고 중학생이었을 수도 있다. 기억이란 게 늘 그렇다.

날짜는 흐릿하고,

사람들 어깨가 부딪히는 느낌...

땅에서 올라오던 습한 냄새...

솜사탕이 너무 달아서 목이 끈적했던 느낌...

대신 감각만 또렷하다.


그날도 사람은 너무 많았다.
주차장부터 이미 지쳤고, 입장 줄에서 한 번 더 지쳤다.
어머니는 "이따가 저쪽도 보고" 같은 말을 하면서도 눈썹 끝이 살짝씩 떨렸고, 나는 덥다고 물 사 달라고 다리 아프다고 계속 투덜댔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말이 없었다.
말이 없으니까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타입.

사실은 감정을 숨기는 사람이었는데, 우리는 그걸 끝까지 습관처럼 오해했다.

그날도 나는 그냥... 아버지가 심심한 줄 알았다.


튤립밭 앞에서였다.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가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그냥 멈춘 게 아니라, 발바닥이 땅에 박힌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어머니가 "왜?" 하고 돌아봤고, 나는 "아빠 뭐 해?" 하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던 것 같다.


아버지는 꽃밭을 봤다.
정확히는, 꽃밭 끝까지 봤다.


붉고 노랗고 보라색이 줄을 지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는 풍경.
꽃이 원래 이렇게 많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꽃은 한두 송이, 화병에 꽂힌 정도였는데 여긴... 땅이 통째로 덮여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웃었다.
큰 웃음이 아니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는 정도.
그런데 그 정도면 아버지한테는 "나 지금 좋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확실한 거의 선언 같은 거였다.

아버지는 손으로 꽃밭을 한 번 가리켰다.


"저거... 참..."


끝까지 말을 안 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아버지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애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보는 걸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보는 얼굴.
그 얼굴이 오래 남았다.


그날 우리가 놀이기구를 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기념품을 샀는지... 그런 건 기억이 안 난다.
대신 기억나는 건, 꽃밭 앞에서 아버지가 누가 불러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던 모습과
마치 거기서 뭔가를 두 눈에 꼭 담아가야 한다는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던 시간이다.


그리고 또 한 번, 튤립이 튀어나온 건 아버지가 아프기 전 어느 날이었다.


TV에서 해외 다큐멘터리가 나왔거나, 달력에 인쇄된 풍경 사진이었거나.
어쨌든 풍차가 있었고, 그 앞에 튤립이 있었다. 딱,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그 장면과 국가인 네덜란드.


아버지는 그 이미지를 보더니 리모컨을 손에 쥔 채로, 채널도 안 돌리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게 좀 이상했다.

보통은

"또 이런 거 나오네" 하고 금방 넘기던 사람이었는데...


그러다 툭, 던지듯이 말했다.


"튤립!!!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꽃이야~"


나는 순간 "진짜?" 하고 되물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같은 말을 하는 걸 거의 못 봤으니까.
아버지는 늘

"그냥저냥"

"뭐, 나쁘진 않지" 이런 식으로 피해 갔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마음이 들킬까 봐 겁나는 사람처럼.


"왜?"

내가 물었나, 어머니가 물었나. 그것도 헷갈린다.


아버지는 대답을 안 했다.
대신 풍차 쪽을 한 번 더 봤다. 화면이든 사진이든. 그리고 아주 작게, 거의 혼잣말처럼 말했다.


"저기는... 꽃이 저렇게 펴도, 허세가 없네."


허세.
꽃을 두고 ‘허세’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근데 웃기게도, 그 말이 꽤 정확했다.

튤립은 화려하긴 한데, 장미처럼 찔러오는 느낌이 없다. 백합처럼 향으로 방을 장악하지도 않는다.
그냥 줄기 하나로 똑바로 서 있다가 어느 순간 딱 피고, 어느 순간 딱 사라진다. 길게 붙잡지 않는다. 누굴 불러 세우지도 않는다.


아버지는 자기가 평생 그렇게 살았다고 믿었으니까 아마 그게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똑바로 서서...

아무 말 없이...

필요한 만큼만...

그리고 조용히...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어느 밤, 나는 결국 튤립을 검색했다.


검색창에 튤립 꽃말을 치고 나서 꽃말 같은 걸 믿는 성격이 아닌데 왜 이걸 보고 있나 싶어서 잠깐 멈췄다.
그래도 지우지 못했다. 손가락이 한 번 멈추면 마음도 같이 멈추는 법인데, 그날은 마음이 멈추질 않았다.


화면 밝기가 생각보다 밝아서, 나는 폰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
조용한 방에서 그 빛만 혼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글자가 떴다.
그 순간, 목이 먼저 마르고 속이 쿡 내려앉았다.


빨간 튤립은 고백.
보라색은 영원.
노란 튤립은... 바라볼 수 없는 사랑, 혹은 헛된 사랑.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었다.
꽃말이야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고, 누가 정한 건지도 모른다. 나도 그런 걸 따지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그날 밤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지 못한 말들이
저 꽃 이름 뒤에 얇게 붙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사랑한다"를 말하지 못했다.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말하는 법을 배울 틈이 없었던 사람 같았다.
아버지의 사랑은 대체로

"밥 먹었나"

"춥다, 옷 챙겨라"

"조심히 다녀라" 같은 말로만 나왔다.

그러다가도 정작 중요한 순간엔, 아무 말도 못 하고 헛기침만 했다.

우리도 그걸 그냥 넘어갔다. 다들 바쁘니까...


튤립이란 건... 어쩌면 아버지한테 가능한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입으로 하기엔 민망하고, 글로 쓰기엔 더 민망한 것들을 그냥 ‘튤립’이라는 단어 하나에 조용히 숨겨두는 방식.


장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아버지가 잠들어 있는 수목장에 갔다.


처음엔 그냥 가려고 했다.
꽃 같은 거 들고 가봤자 금방 시들고, 결국 바람에 날려가거나 누군가 치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데 꽃집 앞에서 발이 멈췄다.


튤립이 있었다.
아직 봉오리인 것도 있고, 이미 활짝 벌어진 것도 있었다.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서 있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계속 계산했다.


"얼마나 가지, 며칠이나 버틸까."


꽃을 보면서도 늘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우리 집 습관이었다.


꽃이 시들면 결국 쓰레기가 된다.
아버지가 늘 하던 말이 떠올랐다.


"돈 아깝게 시들 걸 왜 사냐."


맞는 말인데... 그날은 그 말이 이상하게 슬펐다.
맞는 말이라서 더 슬펐다.


결국 조화 튤립 한 송이를 골랐다.
시들지 않는 꽃.

아버지는 이런 걸 보면 "가짜잖아"라고 했을 것 같은데...
그래도 그날은, 오래 남아 있어줬으면 했다. 아직은 금방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수목장 앞에 섰을 때,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불었다.
나무들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데,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눈이 자꾸 흐려졌다.


조화 튤립을 내려놓으면서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나오질 않았다.
목이 막힌 게 아니라, 말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느낌.
그래서 그냥 한참 거기 서 있었다.


아버지도 아마 그랬을 거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도 꺼내는 법을 몰라서... 그냥 거기 서 있었던 사람처럼...
그래서 나도 그냥 서 있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왜 튤립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에버랜드에서 처음 봤던 붉은 물결이 마음에 박힌 것일 수도 있고, 풍차 사진 속 풍경에 오래된 무언가를 투영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이유 없이 좋았을 수도 있다.
사람 마음이란 게 꼭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

좋아하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고, 어떤 건 설명이 안 된다.


아버지도 그런 식으로 살았을 거다. 설명 없이 대신 몸으로...


다만 이제는... 이런 건 안다.
아버지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들은, 대개 아버지 자신과 닮아 있었다는 것.
똑바로 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피고,
그리고 누구한테도 크게 알리지 않고 다음 계절로 넘어가는 것처럼...


수목장 나무 아래 놓아두고 온 그 튤립이 바람에 쓰러지지 않고 잘 있을지, 원래 조화는 잘 안 쓰러진다는 걸 알면서도 집에 오는 내내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손을 못 씻었다.
꽃집에서 건네받은 비닐봉지의 감촉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아빠, 우리도 아빠를 많이 사랑했어.
말은 잘 못 했지만... 우리도 그랬어.


그 말이 늦었다고 해서 무의미한 건 아니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떤 날은 그 믿음이 금방 무너진다.

그럴 땐 ‘사랑해’ 같은 말 대신, 그냥 ‘튤립’이라고만 속으로 부른다.

그 단어가 아버지를 떠올리는 데엔 충분하니까.

이전 16화16화. 외롭고 긴 투병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