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보다 더 아팠던 현실
집에서의 간병은 4년을 넘기고 있었다.
큰방은 더 이상 방이 아니었다. 전동침대와 24시간 쉬지 않는 산소발생기, 정해진 시간마다 지잉- 틱 하고 울리는 위루관 영양 펌프, 가래를 뽑는 석션기, 수치를 깜빡이는 모니터와 알람. 집은 사는 곳이라기보다 유지하는 곳이 되어 있었다.
힘들었다. 밤잠을 설치는 건 일상이었고, 가족들의 신경은 늘 팽팽했다. 그래도 우리는 버텼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만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적어도 이곳에는 ‘가족의 눈’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낯선 타인의 손에 함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확신. 사람대접을 받는다는 믿음. 그 한 가지가 우리를 붙잡았다.
그러다 그 팽팽하던 줄이, 정말로 툭 끊어졌다.
어머니 무릎이 먼저였다. 몇 년 전부터 연골이 거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얼굴이 잠깐 구겨졌고, 서 있을 때도 한쪽 다리에 체중을 덜 싣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나중에 수술하면 돼”
라고 했다. 나중에.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우리는 이미 아버지를 통해 배워놓고도 또 믿어버렸다.
아버지 체위를 바꾸고, 기저귀를 갈고, 밤중에 석션을 하느라 쭈그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서는 일이 매일 반복되면서 무릎은 더 빨리 닳았다. 어느 날은 큰방에서 나오다가 어머니가 문턱에서 멈췄다. 넘어질 뻔한 게 아니라... 발이 그냥 안 떨어졌다. 서 있는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괜찮아”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긴 했는데, 그 말이 공중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병원에서는 악화라고 했고, 어머니는 결국 거의 걷지 못하게 됐다. 미루고 미루던 대가가 한 번에 몰려온 느낌이었다. 그 순간, 간병의 중심축이 통째로 무너졌다.
선택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직장에 다니는 우리 남매가 24시간 아버지를 볼 수는 없었다. 누군가 퇴근 후 밤을 새우면, 다음 날 누군가는 회사에서 멍한 얼굴로 버텨야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돌려도 빈 시간은 생겼다. 그 빈 시간은 늘 새벽이었다. 늘 가장 위험한 시간.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셔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것이 돌봄의 연장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항복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음속 어디선가 누군가가 계속 말하는 것 같았다.
너희가 끝까지 못 지켰다.
그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사람은, 사실 나였다.
아버지를 사설 구급차에 태워 요양병원으로 향하던 날.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집을 보며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체념 같은 게 굳게 다문 입매에 걸려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끝내 모른다. 다만 그 눈 감는 속도가... 너무 천천히 닫혔다. 마치 “알았다”라는 말 대신 눈꺼풀로 대답하는 것 같았다.
처음 들어간 요양병원의 공기는 집과 완전히 달랐다.
소독약 냄새와 노인들의 체취가 뒤섞인 눅눅함. 복도에서는 호출 벨이 끊이지 않았고, 식사 카트와 약물 카트가 바닥을 긁는 드르륵 소리가 밤에도 이어졌다. 집에서는 우리가 소리를 죽이며 살았는데, 그곳은 반대로 소리로 살아 움직였다. 소리가 너무 많아서, 사람이 없어지는 느낌.
아버지는 침대에 눕는 순간부터 불안해했다. 매트리스의 쿠션감도, 베개의 높이도, 기계의 위치도, 아무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람이 달랐다. 어머니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온 낯선 간병인.
“환자분~”
하고 부르면서도, 환자라는 말에 사람의 체온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눈으로 계속 문 쪽을 찾았다. 입을 크게 벌려
“쩝, 쩝”
소리를 냈고, 입 모양을 과장되게 벙긋거렸다.
집에 가자. 데려가라.
그 말이 소리로는 나오지 않는데도, 우리는 알아들었다. 알아들어서 더 괴로웠다.
면회가 끝날 때마다 침대 난간을 쉽게 놓지 못했다.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버지를 남겨두고 도망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을 스스로에게 주사하듯 반복하면서도, 속은 계속 헛헛했다. 어머니 무릎을 떠올리면 또 입을 다물게 됐다. 어머니도 버티다 무너졌다. 그럼 우리는... 어쩌면 당연히 무너지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국내에서 루게릭 전문으로 알려진 곳의 입원 대기가 풀렸다는 연락이었다. 시설도 좋고, 무엇보다 의료진과 간병인이 병을 이해한다는 말. 중증이라서 설명을 백 번 해야 하는 그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감이 우리를 잠깐 살려냈다.
“됐다. 이제 좀 숨 쉬겠다.”
그 말을 하고 나서야, 우리가 얼마나 숨을 참으며 살았는지 알았다.
그런데 그 안도감은 오래 못 갔다.
입원 전 필수 검사에서 아버지의 가래에서 다제내성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균(MRAB)이 검출되었다. 전염 위험. 격리. 입원 불가. 말 몇 마디가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현실처럼 안 느껴졌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친절했는데, 그 친절함이 더 차가웠다.
“격리가 해제된 뒤에 다시 신청하세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는 뜻이었다.
일반 요양병원들은 MRAB라는 단어만 듣고 조용해졌다.
“아... 그건...”
“죄송하지만...”
“저희는...”
전화가 끊길 때마다 집 안 공기가 더 얇아졌다. 우리가 다급해질수록, 병원들은 더 조심스러워졌다. 조심스러움은 결국 거절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우리는 간신히 격리 병동이 있는 한 요양병원을 찾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도망치듯 그곳으로 향했다.
그 병원은 1인실 격리 병동이었다.
말이 좋아 1인실이었다. 문에는 접촉 주의 표지가 붙어 있었고, 병실은 유리창 하나로 복도와 분리되어 있었다. 보호라기보다 고립에 가까웠다. 병실 안 공기는 정체되어 있었고, 창문을 열 수 없었다. 사람도 들어오길 꺼렸다.
간병인들은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들어오며 한숨부터 쉬었다.
“아휴, 덥다.”
그 말이 아버지 귀에 그대로 꽂히는 게 보였다. 아버지는 말을 못 했지만, 늘 너무 정확하게 듣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병동에서도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중증 환자였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의사소통이 어렵고, 수시로 석션이 필요했다. 간병인들 눈에는 아버지가 환자가 아니라 ‘일감’처럼 보였다. 그리고 일감 중에서도 기피 대상. 케어 순서는 늘 마지막이었다.
흡인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버지 가슴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올라왔다. 그 소리는 기계음보다 더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기침 한 번 못 하는 몸에서, 가래는 올라오는데 나갈 길이 없었다. 욕창을 막기 위한 체위 변경도 자주 미뤄졌다. 기저귀는 묵직하게 불어나도 “조금만 더 있다가”가 반복됐다. 침대 시트가 젖고, 아버지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우리는 면회 때마다 확인했다. 확인하는 사람은 보호자였고, 바꾸는 사람은 항상 타인이었다. 그 사이가 문제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선을 넘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짜증 섞인 말투였다.
“아, 또?”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
그다음은 손길이었다. 급해진 손, 거칠어진 손. 몸을 돌릴 때 던지듯 밀고, 석션이 잘 안 들어갈 때 얼굴을 확 잡아당기고. 흔적이 뚜렷하게 남는 폭력은 아니었다. 대신 매일 조금씩, 사람의 존엄을 닳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아버지는 그 모든 걸 느끼고 있었다. 정신이 또렷했기 때문이다.
맞았다는 사실보다 더 아픈 건, 맞는 나를 내가 다 알고 있다는 것.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소리로 말할 수 없다는 것. 그 수치심이 아버지 눈에 붙어 있었다. 눈이... 너무 또렷해서. 그게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면회를 갔는데 아버지 이마에 붉은 자국이 있었다. 팔에는 손가락 모양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멍이 어설프게 퍼져 있었다.
“어디 부딪히셨나 봐요.”
간병인은 그렇게 말했다. 말투는 아무렇지 않은데, 눈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오히려 확신이 됐다. 우리는 서로를 잠깐 봤다. 그 짧은 시선 교환만으로도 ‘알았다’가 끝나버렸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잠시 병실을 비운 사이 녹음기를 켜두었다.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런데 그때는... 좋은 방법을 고를 여유가 없었다. 확신이 필요했다. 우리가 미쳐가는 게 아니라, 진짜로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녹음기 속 소리는 길지 않았다. 짧았는데도, 너무 많은 걸 담고 있었다.
손이 부딪히는 소리,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 누군가가 짜증 섞인 말로 내뱉는 숨, 그리고 아버지의 거친 숨소리.
“쩝... 쩝...”
그 소리가 이어졌다. 말 대신 나온 비명 같은 소리.
그 파일을 듣는 순간, 나는 숨이 막혀 바닥에 주저앉았다.
분노가 먼저가 아니었다. 분노는 너무 정상적인 감정이라서, 그보다 더 먼저 온 건 죄책감이었다.
우리가 아버지를 여기 넣었다.
우리가 문을 닫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고 스스로를 속였다.
그 생각들이 동시에 몰려와서, 내 안에서 뭔가가 뚝 부러졌다.
그 진실은 병원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면 어머니는 무너질 게 분명했다. 이미 무릎 때문에 자신을 탓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몸만 멀쩡했으면...”
그 말을 어머니가 중얼거릴 때마다, 우리는 대답을 잃었다. 그 죄책감 위에 또 다른 죄책감을 얹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형제들끼리 입을 다물었다. 대신 행동하기로 했다.
“당장 옮기자. 하루도 더 못 있어.”
하지만 현실은 또 한 번 우리를 붙잡았다. MRAB 격리실이 있는 다른 병원을 찾는 건 어렵고, 전원 절차에는 시간이 걸렸다. 최소 3일.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자마자, 3일이라는 숫자가 칼처럼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3일을 더 버텨야 했다.
그 3일 동안, 우리 형제들은 직장에 휴가를 내고 24시간 교대로 병실을 지켰다.
간병인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병원 규정이었고, 간병인 없이 환자를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호자 의자에 앉아 눈이 되었다. 몸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눈으로만 지키는 사람.
형광등은 꺼지지 않았다. 밤에도 낮 같은 빛이었다. 복도에서는 다른 환자들의 신음이 끊기지 않았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도, 간병인이 침대 쪽으로 다가가면 몸이 먼저 일어났다. 석션기 소리가 조금만 거칠어져도 나는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살살해주세요.”
그 말이 부탁인지 경고인지 나도 헷갈렸다. 그 정도로 우리는 바닥까지 몰려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가 곁에 있는 동안 눈빛이 달랐다. 아주 조금, 정말 조금의 안도감이었던 거 같다.
그런데 그 안도감 뒤에... 또 다른 감정이 붙어 있었다.
'너희가 없을 때는 또 어떡하냐...'
그 질문이 아버지 눈에 서려 있었다. 말로는 못 하지만, 눈은 그런 걸 다 말한다. 그런 걸 알게 되는 게 가족의 불행일 때가 있다.
우여곡절 끝에 다른 요양병원으로 전원 했다.
적어도 그런 종류의 폭력은 없었다. 대신 방임이 있었다. 석션은 대충 시늉만 하고 끝났고, 기저귀 교체는 성의가 없었다. 체위 변경은 자주 미뤄졌다. 엉덩이 쪽 피부가 빨갛게 변하는 걸 보며, 우리는 또 손을 꽉 쥐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요양병원 문제는 “어떤 사람이 나쁘냐”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사람이 적고, 시간이 없고, 돌봄이 ‘노동’으로만 계산되는 구조. 환자는 늘 많고, 한 사람의 존엄은 가장 마지막 순위로 밀리는 구조.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기 전에 시스템이 사람을 먼저 지치게 만든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눈앞에서 계속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손길이 정당화되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현실은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를 찌른다.
결국 우리는 다시 전원을 결정했다. 한 달 사이 세 번째 이동이었다.
아버지 몸은 이동할 때마다 급격히 약해졌다. 구급차 진동, 낯선 공기, 바뀌는 얼굴들. 그 스트레스가 아버지 생명을 깎아먹는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덜 나쁜 곳을 찾아 계속 움직이는 것 자체가 이미 비극이었다.
마지막으로 옮긴 병원은 완벽하지 않았다. 시설은 낡았고, 병실은 좁았다.
그런데 그곳에는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는 방식이 남아 있었다. 간병인은 조선족이었지만, 말투가 부드러웠다. 손길은 덜 급했고, 석션은 조금 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어르신, 조금만요. 금방 끝나요.”
“어르신, 등 닦아드릴게요. 차갑죠? 잠깐만 참으세요.”
그 사소한 말 한마디가 우리를 울렸다.
당연한 것인데, 그 당연한 대접을 받기까지 아버지는 너무 많은 시간을 낯선 손 아래에서 견뎌야 했다. 우리는 그제야 숨을 쉬었다. 매를 맞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 숨. 그게 이렇게 큰 일이었다는 게, 오히려 서글펐다.
요양병원과 간병인의 문제는 병보다 더 아팠다.
루게릭병은 아버지 몸을 망가뜨렸지만, 사람의 무례함과 폭력, 방임은 아버지의 존엄을 먼저 깎아먹었다. 말하지 못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처리해야 할 대상으로 만드는 순간, 그 병실은 병원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된다. 우리는 그걸 직접 봤다. 보고도, 문을 닫아야 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 남긴 건 분명했다.
지켜보는 눈이 없으면 약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
그리고, 가족이 아무리 애를 써도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으면 돌봄은 쉽게 무너진다는 사실.
아버지가 떠난 지금도, 그때의 소리들은 가끔 귀에 남아 있다. 호출 벨, 카트 바퀴, 형광등 아래의 기침, 그리고 아버지의
“쩝... 쩝...”
나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속으로 되뇌곤 한다.
미안해요.
그 말은 끝내 닳지 않는다. 닳지 않아서 더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