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편지 : 10번의 안부

색의 이름을 짓는 밤

by 빈스

이름이 불리기 전까지 그것은 그저 빛의

파장에 불과했다.

세상의 모든 색이 잠든 깊은 밤, 나는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누군가의 마음을 꺼내어 조심스레 이름을 지어줍니다.
​모니터 화면 속에는 수많은 숫자가 떠다닙니다.

빨강의 농도, 파랑의 깊이, 그리고 입자의 거칠기까지. 기술적으로는 그저 데이터의 조합일 뿐인 이 차가운 수치들에 제가 '연(緣)'이라거나 '여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누군가의 서랍 속 깊이 간직될 편지가 됩니다. 이름이 없던 무채색의 공기가 '그날의 공기'가 되고, 그저 평범했던 노을빛이 '우리가 헤어지던 온도'가 되는 마법. 저에게 조색은 단순히 색을 만지는 행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에 적확한 집을 지어주는 일에 가깝습니다.



사실 이름을 짓는다는 건 꽤 무거운 책임감이 따르는 일이에요. 내가 지어준 이름 하나가 독자 여러분의 기억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모두가 잠든 고요한 시간에 홀로 앉아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이 푸른빛은 시린 고독일까, 아니면 새벽녘의 희망일까. 이 바랜 갈색조는 낡은 기억의 먼지일까, 아니면 가을날의 다정한 위로일까. 그렇게 수만 번 마음의 농도를 재고 나서야 비로소 한 줄의 안부를 적어 내립니다. 이름을 얻은 색들은 그제야 방랑을 멈추고, 당신의 앨범 속에서 하나의 온전한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제가 얻은 작은 깨달음은, 우리 삶의 무수한 감정도 이름을 붙여주기 전까지는 그저 막연한 불안이나 소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체 모를 슬픔에 '성장의 통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루한 일상에 '평온의 축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감정을 마주하고 다스릴 힘을 얻게 되거든요. 사진 속 색깔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결국 내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정의하고 소중히 여기겠다는 다짐과도 같습니다. 내가 지은 이름들이 당신에게 가닿아, 당신만의 정의되지 못한 감정들을 다독여줄 수 있다면 기록가로서 그보다 더한 보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독자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의 계절을 한 가지 색으로 정의한다면,

그리고 그 색에 당신만의 이름을 붙여준다면 무엇이라 부르고 싶나요?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어설픈 시작의 연둣빛’이라도 좋고, ‘나른한 휴식의 노란색’이어도 충분합니다. 당신이 그 감정에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그 평범한 순간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만의 역사가 될 테니까요.




​기록은 단순히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오늘도 나는 어두운 작업실에서 아직 이름 모를 당신의 내일을 위해 새로운 빛깔을 고르고 이름을 짓습니다. 내가 지은 이 다정한 이름들이 당신의 복잡한 마음 한구석에 작은 이정표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우리가 각자의 감정에 이름을 붙여줄 용기를 가질 때, 우리의 평범한 하루는 비로소 빛나는 문장이 되어 영원히 남겨질 수 있습니다.



[8화 예고]
카메라의 성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렌즈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입니다. 도구의 한계를 넘어 나만의 세상을 담아내는 법, <8화. 11가지 빛으로 수집한 계절의 기록>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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