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가지 빛으로 수집한 계절의 기록
달력은 열두 달로 나뉘어 있지만, 내가 수집한 계절은 열한 가지의 빛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1부터 11까지 숫자가 매겨진 색감의 나열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 기록들은 지난 한 해 동안 맞닥뜨린 감정의 좌표들이에요. 초봄의 아직 가시지 않은 서늘한 보랏빛부터, 한여름 뙤약볕이 만들어낸 짙은 녹색의 그림자, 그리고 눈 내리기 직전의 무거운 회색빛까지. 나는 그 미세한 틈새의 빛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열한가지의 색을 준비했습니다.
사실 11이라는 숫자에 거창한 의미는 없어요.
그저 내가 가장 사랑했던, 혹은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순간들을 추려보니 우연히 그 숫자에 머물렀을 뿐이죠. 어떤 빛은 너무나 선명해서 눈이 시리고, 어떤 빛은 너무나 흐릿해서 한참을 들여다봐야만 그 형체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열한 개의 조각들이 모였을 때, 비로소 나의 일 년은 ‘안부’라는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기록한다는 건 어쩌면 나만의 단위를 만드는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남들이 정해놓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틀이 아니라, 내가 느낀 온도를 기준으로 시간을 잘게 쪼개는 일 말이죠. 나에게 5월은 푸른 잎사귀의 달이 아니라 ‘연(緣)의 편지’처럼 노란 햇살이 따스하게 감기던 달로 기억되듯, 당신의 시간도 당신만의 색으로 다시 쓰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열한 가지 빛을 수집하며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건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그날의 공기와 나를 감싸던 빛의 농도였다는 것을요. 당신의 일 년은 지금 몇 가지의 색으로 기억되고 있나요? 누군가에게는 단 한 가지의 강렬한 빨간색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수만 가지의 무채색일 수도 있겠죠. 그게 무엇이든 당신만의 단위로 시간을 기록해 보세요. 세상이 말하는 일 년보다 훨씬 더 풍성한 당신만의 계절이 그곳에 숨어 있을 테니까요.
어두운 작업실에서 열한 번째 빛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합니다. 이 기록들이 당신의 손에 닿았을 때, 당신의 평범했던 하루가 나만의 열한 가지 빛 중 하나로 아름답게 물들기를. 그렇게 우리 각자의 계절이 조용히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9화 예고]
카메라의 성능보다 중요한 것은 그 렌즈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입니다.
도구의 한계를 넘어 나만의 세상을 담아내는 법,
<9화. 도구는 죄가 없다, 다만 시선이 머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