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편지 :10번의 안부

도구는 죄가 없다, 다만 시선이 머물 뿐

by 빈스

완벽한 장비를 기다리느라 놓쳐버린 수많은 찰나에 대하여


가장 비싼 렌즈를 들고도 정작 눈앞의 기적 같은 찰나를 놓쳐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장비에 매몰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록의 목적이

'내 순간'이 아니라 '기계의 성능을 증명하는 일'로 변질되곤 하거든요. 렌즈의 해상도를 따지고 수치를 맞추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정작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미소나 공기의 미세한 떨림 같은 건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나 역시 그랬어요.

더 밝은 렌즈와 비싼 바디를 손에 넣으면 내 삶의 해상도도 함께 높아질 거라 믿었죠. 하지만 정작 그 차가운 유리알들이 내게 준 건 정교한 데이터였을 뿐, 가슴을 울리는 다정한 여운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인천 앞바다에 안개가 낮게 깔린 날이 있었어요. 야심 차게 들고 나간 카메라는 초점을 잡지 못해 계속해서 헛돌기만 하더군요. 기계의 눈에는 그저

'앞이 보이지 않는 오류'였겠지만, 내 눈에 비친 그 풍경은 생경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결국 카메라를 가방에 처박고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최신 장비가 포착하지 못한 그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잘것없는 렌즈가 오히려 서투르게나마 담아내는 걸 보며 깨달았어요. 도구는 단지 시선을 거드는 그릇일 뿐,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의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건 결국 내 시선이라는 사실을요.

우리는 종종 '나중에 더 좋은 카메라가 생기면'이라며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길 미룹니다. 하지만 기록의 가장 큰 적은 부족한 도구가 아니라 '나중'이라는 핑계예요. 사실 도구의 한계는 새로운 시각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멀리 찍을 수 없으면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용기를 얻고, 화질이 떨어지면 그 거친 입자 사이로 나만의 상상력을 채워 넣게 되니까요. 도구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도구 뒤에 숨어 세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나는 이제 장비의 스펙을 비교하는 시간보다

내 마음이 어디에서 멈추는지 관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완벽한 도구는 어디에도 없지만,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을 가장 나답게 담아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손'은 늘 여기 있거든요.


​오늘 당신이 쥐고 있는 그 익숙한 도구를 한 번 믿어보세요. 투박한 일상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낭만을 발견하는 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의 기술이 아니라, 그 너머를 끝까지 응시하는 당신의 다정한 눈빛입니다. 당신의 도구가 무엇이든, 그 안에 당신만의 온기가 가득 담기길 응원합니다. 도구에 얽매이지 않고 비로소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볼 때, 당신의 기록은 비로소 당신을 닮은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띠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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