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는 죄가 없다, 다만 시선이 머물 뿐
가장 비싼 렌즈를 들고도 정작 눈앞의 기적 같은 찰나를 놓쳐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장비에 매몰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록의 목적이
'내 순간'이 아니라 '기계의 성능을 증명하는 일'로 변질되곤 하거든요. 렌즈의 해상도를 따지고 수치를 맞추는 데 온 신경을 쏟느라, 정작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미소나 공기의 미세한 떨림 같은 건 시야 밖으로 밀려나 버립니다. 나 역시 그랬어요.
더 밝은 렌즈와 비싼 바디를 손에 넣으면 내 삶의 해상도도 함께 높아질 거라 믿었죠. 하지만 정작 그 차가운 유리알들이 내게 준 건 정교한 데이터였을 뿐, 가슴을 울리는 다정한 여운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인천 앞바다에 안개가 낮게 깔린 날이 있었어요. 야심 차게 들고 나간 카메라는 초점을 잡지 못해 계속해서 헛돌기만 하더군요. 기계의 눈에는 그저
'앞이 보이지 않는 오류'였겠지만, 내 눈에 비친 그 풍경은 생경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결국 카메라를 가방에 처박고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습니다. 최신 장비가 포착하지 못한 그 몽환적인 분위기를, 보잘것없는 렌즈가 오히려 서투르게나마 담아내는 걸 보며 깨달았어요. 도구는 단지 시선을 거드는 그릇일 뿐, 풍경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음의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건 결국 내 시선이라는 사실을요.
우리는 종종 '나중에 더 좋은 카메라가 생기면'이라며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길 미룹니다. 하지만 기록의 가장 큰 적은 부족한 도구가 아니라 '나중'이라는 핑계예요. 사실 도구의 한계는 새로운 시각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멀리 찍을 수 없으면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용기를 얻고, 화질이 떨어지면 그 거친 입자 사이로 나만의 상상력을 채워 넣게 되니까요. 도구는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 도구 뒤에 숨어 세상을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 게 진짜 문제일지도 모르죠.
그래서 나는 이제 장비의 스펙을 비교하는 시간보다
내 마음이 어디에서 멈추는지 관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완벽한 도구는 어디에도 없지만,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을 가장 나답게 담아낼 수 있는 '지금의 내 손'은 늘 여기 있거든요.
오늘 당신이 쥐고 있는 그 익숙한 도구를 한 번 믿어보세요. 투박한 일상 속에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낭만을 발견하는 건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의 기술이 아니라, 그 너머를 끝까지 응시하는 당신의 다정한 눈빛입니다. 당신의 도구가 무엇이든, 그 안에 당신만의 온기가 가득 담기길 응원합니다. 도구에 얽매이지 않고 비로소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볼 때, 당신의 기록은 비로소 당신을 닮은 가장 아름다운 색깔을 띠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