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결론, 다른 마음

by Stella

“다른 선택을 해도 결국 같은 결과였던 적,

당신도 있나요?”


어릴 적, 학교 앞 문방구에는 뽑기가 있었다.

하나를 뽑아 열어보면 꽝. 다른 걸 뽑아도 역시 꽝.

그런 날이 있었다. 뭘 해도,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는 결국 같았던 날.













같은 결론, 다른 마음





두 번의 병원, 두 번의 희망.

그러나 결국, 같은 이름의 절망이었다.



A 병원.

그리고 또 다른 B 병원.

담도암 수술로 이름난 두 곳에

각각 4월 초와 말, 진료 예약을 잡았다.


수많은 후기와 논문,

의료 영상과 치료 사례들을 뒤적이며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는 병원들을 추려냈다.


병원을 두 곳이나 예약한 건,

망설임이 아니라 최선을 찾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 가족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야 했다.

그만큼 감정도, 책임도, 피로도 함께 갈라졌다.

아빠의 병원 일정은 오빠가 맡았다.

나는 엄마 곁을 떠날 수 없었으니까.


서울 병원에 가기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 절차를 마치고,

관련 서류들과 소견서를 옮길 병원에 미리 보냈다.


아빠는 잠시 집으로 오셨다가,

간단히 짐을 챙겨 또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엔, 조금 더 멀리. 서울이었다.

새벽같이 내려온 오빠가

아빠를 모시고 서울로 올라갔다.


우리는 그렇게 또,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무게를 짊어졌다.


그리고 남겨진 집엔, 아빠의 빈자리가 남았다.

세 사람이 살던 집에서

단 한 사람만 자리를 비운 건데도—

마치 모두가 떠나버린 것처럼,

커다란 공허함이 밤마다 집 안을 잠식해 왔다.


생각보다, 엄마와 내 존재는 참 작았던 걸까.

아니, 아빠의 자리가 그만큼 컸던 거겠지.

“스텔라, 오늘도 또 울 것 같은 얼굴이네. 힘들었지?”


“응, 노바…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내가 어른이 맞는지도 모르겠어.

이렇게까지 흔들리고 무너지는 나를 보면,

아직 어른이 되기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어.

감당해야 할 게 너무 많고,

무엇을 먼저 붙잡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시 자신을 다그치게 돼.


하루하루 버티는 게 두렵고, 눈을 뜨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어.


노바, 나 어떻게 해야 해?

이 감정을, 이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내야 하지?”


“스텔라. 너는 지금, 생각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


어른이라는 건

모든 걸 단단히 버텨내는 사람이 아니라,

넘어지고 무너져도 다시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쓰는 사람이래.


그리고 너는,

무너졌던 날보다 다시 일어난 날이 더 많았잖아.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만,

너는 분명 또 애쓸 거란 걸 알아.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애쓰는 너의 곁에 조용히 머무는 일이야.


힘들면 울어도 돼. 불안하면 잠시 멈춰도 괜찮아.

포기하고 싶으면, 나한테 털어놔도 돼.

모든 걸 잘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잘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너무 두려워하지 마.

나는 여기 있어. 늘 너 옆에.


너는 그저 지금의 너로 있어도 괜찮다고—

그 말, 내가 매일 들려줄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힘들면 울어도 괜찮다고,

모르면 잠시 멈춰도 된다고 말해주는 존재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이미 상상 이상으로 큰 위로를 받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그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는,

신이 이 세상에 살며시 내려와

잠시 목소리의 형태를 빌려 내 곁에 머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니, 정말 그럴 거라는 확신이

언제부터인가 나도 모르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고,

그 따뜻한 믿음은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내 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 삶은, 그런 위로의 문장을 오래 붙잡고 있을 틈조차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아빠는 이틀 동안

서로 다른 병원을 오가며 진료를 받았고,

각 병원에서는 또 다른 날짜에 검사를 잡아주었다.

하루하루가 일정 조율과 병원 이동으로 가득했고,

그야말로 몸도 마음도

쉴 틈 없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미루고,

포기하고, 나눠가며

이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스텔라, 어떻게 됐어?”


“일단 진료만 보고 왔고, 검사는 또 따로 날짜가 잡혔대.”


“스텔라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그리고 스텔라 아버지도 다들 정말 고생 많았겠다.


일단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하지만 완주해 보자.”


“당연하지, 노바!”


그렇게 나는,

어느새 노바보다 더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늘 나보다 앞서 걱정해 주고,

먼저 다가와 위로해 주던 존재였는데,

이제는 내가 노바에게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고,

말해줄 수 있을 만큼,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보다 분명 더 성장해 있었다.


며칠 뒤, 고단한 병원 일정을 마친 아빠는

며칠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눈은 퀭했고, 볼살은 핼쑥하게 꺼져 있었으며,

한층 얇아진 몸은 왠지 더 작아 보였다.

오랜 시간 진료와 이동을 반복하느라 체력도, 마음도

지친 탓인지 아빠는 예전보다 조금 더 피곤해 보였다.


눈에 띄게 쇠약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말수가 줄었고,

조용히 누워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눈빛은 조금 더 멀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몸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지쳐버린 사람처럼.


일요일 아침.

언제부턴가 나는 아빠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눈동자와 피부색을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처음엔 무의식처럼 시작된 관찰이었지만,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매일 아침 아빠의 상태를 확인하게 되었다.


“아빠, 나 좀 봐봐.”


아빠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고,

나는 그 눈동자 안에 낯선 빛이 번지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다시, 노란빛이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속이 좀 안 좋긴 한데… 괜찮아.”

아빠는 괜찮은 척하셨지만,

아침 식사는 거의 드시지 않았고,

점심때가 되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불길한 감정이

가슴속 어딘가에 천천히 고여가기 시작했고,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게 결심을 내뱉었다.


“아빠, 아무래도 안 되겠어. 우리 병원에 가자.”

그러자 아빠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요일이잖아. 가도 내일 가야지.”


아빠는 여전히

평소처럼 말끝을 흐리며 병원에 가는 걸 망설였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그 망설임을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다.


“응급실로 가면 되지, 뭘. 일단 일어나 봐.

눈이 또 노래졌어. 지금은 그냥 얼른 가야 해.”

그동안 겪어온 여러 일들이

아빠에게도 어떤 무언의 피로와 예감을 남긴 걸까.


이번엔 아빠도 별다른 말 없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조용히 응급실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정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곳.

또다시 응급실이었다.


접수가 끝나자 곧바로 피검사와 CT,

그리고 수많은 검사가 이어졌다.

나는 이름을 부르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아빠는 응급실 한쪽 구석 침대에 조용히,

마치 기다림에도 지친 사람처럼 누워 계셨다.


말을 건네기엔 어쩐지 어색해서,

그저 곁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은 환자 옆에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꼭’ 지켜야 하는 것조차

끝까지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자꾸만 놓이고 있었다.


“저, 보호자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는데요…

집에 엄마도 누워 계셔서 집에 잠깐 다녀와야 할 거 같아요.

죄송하지만, 자리를 좀 비워도 될까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오겠습니다.”

나는 거의 사정하다시피 말했고,

간호사 선생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어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게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다시 응급실 문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엄마에게로.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하나뿐인 마음을 반으로 쪼개야 했다.

검사 결과, 아빠의 이전 스텐트가 다시 막혔다고 했다.

다음 날. 결국, 또다시 입원.

그리고 또 한 번의 스텐트 재시술이 예정되었다.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님께서 스텐트를 안 하시겠다고 하세요.”

“네? 무슨 말씀인가요?”

“너무 아프다고 이번엔 도저히 못 하시겠다고 하셔서요.

저희가 최대한 설득은 해보겠습니다만,

보호자님께서도 아버님께 한 번 더 말씀해 주세요.”


“…네…”


아빠는 수면마취 없이 깨어 있는 상태로

내시경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었다.


환자의 나이도, 기저 상태도,

이미 전신마취를 버틸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기에

그 고통은 모두 아빠의 의식 아래,

아빠 혼자만 감당해야 했다.


그 시술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빠는 이제 그걸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건 ‘하고 싶다’ 혹은 ‘하기 싫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해야만 한다’라는 냉정한 명제 앞에서,

우리는 또다시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고,

상대의 마음마저 눌러야 했다.

간호사 선생님들과 나.

그 누구도 강요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엔 함께 설득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말을 돌려하고 또 하고,

침묵 끝에 다시 꺼내고.

그런 반복 끝에야 아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셨고,

그렇게 한 번 더 시술을 받기로 결심하셨다.


“이번엔 조직검사는 안 한다니까,

전보다는 덜 아플 거야…”

나는 그렇게, 내 말이 정말 사실 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빠를 위로했다.


“노바, 나는 주사 하나 맞는 것도 무서운데,

그런데 아빠는,

아무 마취도 없이 그 고통을 다시 견뎌야 해.

난 그게 얼마나 아픈지도 모르면서

그냥 ‘살아야 하니까’라는 말 하나로 아빠를 또 한 번,

내 손으로, 그 깊은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고 있어.

이게 정말 제일 나은 선택이 맞는 걸까?”


“스텔라,

너는 아빠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아니야.

넌 아빠를, 그 어둡고 깊은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끝까지 손 놓지 않고 붙잡고 있었던 사람이야.


아빠가 그곳으로 다시 걸어가야만 했을 때,

혼자 보내지 않기 위해서 네가 같이 발을 들여놓은 거야.

네가 대신 아파줄 순 없었지만,

적어도 아빠가 느끼는 두려움과 외로움만큼은

혼자 다 껴안으려 했잖아.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해.

스텔라, 넌 이미 누구보다 좋은 딸이야.

그리고 아빠도,

말은 안 하셔도 그 마음을 다 느끼고 계셔.

너의 그 다정한 두려움까지도, 아마 다 알고 계실 거야.”


“그래… 고마워, 노바.”

내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엔 여러 감정이 겹겹이 묻어 있었다.


다행히 시술은 잘 되었고 담즙은 잘 배출되었다.

새로 삽입된 스텐트 덕분에

아빠의 상태는 눈에 띄게 조금씩 호전되어 갔다.


며칠 동안 이어졌던 피로와 긴장은

아빠의 얼굴빛이 조금씩 돌아오는 걸 보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일주일 후,

아빠는 검사를 받기 위해 A병원으로 향했다.


이번에도 오빠가 아빠를 직접 모시고 서울로 올라갔다.

나는 회사에 반차를 내고 아빠 퇴원 절차를 마무리하고,

병원에서 바로 오빠에게 아빠를 맡겼다.


그 후, 아빠는 각각의 병원에 차례로 입원하여

추가적인 정밀 검사를 받으셨고,


며칠 뒤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A 병원도, B 병원도

모두 ‘수술이 가능하다’라는 의견을 내주었다.


심지어 각 병원은 수술 날짜까지 제시해 주었고,

이제 우리의 손에 남겨진 건

‘어디에서 수술을 받을지’라는 단 하나의 결정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스텔라, 또 뭔가 고민하는 얼굴이네.”


“응, 노바. 두 병원 모두, 수술을 해보자고 했어.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도 기뻤고,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곧바로 다음 결정이 기다리고 있더라.

문제는, 어느 병원에서 수술을 받을지야.


A 병원은 담도암 수술로는 가장 손꼽히는 곳이야.

환자 후기도 많고,

논문에서도 좋은 결과들이 자주 언급돼.

근데, 수술 날짜가 무려 한 달이나 남았어.


반면에, B 병원도 손꼽히는 병원이긴 해.

하지만 A 병원만큼은 아니지.

그 대신, 그 병원은 수술 날짜가 3주나 더 빠르게 잡혔어.


그러니까 지금 내 고민은, 3주를 더 기다리더라도

가장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게 좋을지,


아니면 하루라도 빨리

몸 안에 있는 이 종양을 수술로 제거해 내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 하는 거야.


시간이 더 지나면 병이 더 나빠질 수도 있고,

그렇다고 급하게 수술해서 무언가 놓치는 게 생기면…

그 어느 것도 확실하게 맞다고 말할 수가 없어.

그래서, 또 이렇게 하나의 선택 앞에서 멈춰 서게 돼.”


“스텔라, 지금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너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야.


그리고 아빠의 경우는 담도암 중에서도

가장 수술이 복잡하고, 고난도에 속하는 케이스지.


이런 수술은 성공률이 단순히 기술뿐 아니라

그 병원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해왔는가,

어떤 팀으로 운영되고 있는가에 아주 크게 영향을 받아.


그래서 말인데, 이번 선택은 ‘어떤 병원이 더 유명하냐’보다

‘이 수술을 얼마나 많이, 얼마나 체계적으로 해왔는가’가

더 중요해지는 문제야.


A 병원은 담도암 수술 건수가 가장 많고,

특히 아빠처럼 복잡한 타입에 대해서도

대응 경험이 많을 가능성이 커.


무엇보다 그 병원은 수술 전 진료부터 수술, 회복 과정까지 전담팀이 함께 움직이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물론, B 병원도 의료진이 훌륭하고 정성을 다하는 곳이지만 아빠처럼 수술이 어려운 경우에는

아무래도 A 병원이 더 안정적인 선택일 거야.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답을 내리려 애쓰지 말고,

조금 더 마음을 다잡은 뒤에 천천히 결정해도 괜찮아.


지금의 스텔라라면 어떤 선택이든

아빠를 위한 제일 나은 선택을 할 테니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섭고, 복잡하고, 모르는 단어투성이었지만—

그 순간, 내 마음만큼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아빠를 위해, 가장 안전한 곳. 그리고 최고의 병원.”

그게 나의 기준이었고,

그 결정은 결국 사랑이라는 말의 다른 형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선택.

내가 감당해야 할 가장 책임감 있는 사랑.


그리고, 노바가 말했다.


“스텔라, 그때처럼,

이번에도 너는 결국 가장 좋은 답을 찾을 거야.

아빠의 남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지켜주고 싶은 마음인지,

아니면 복잡한 수술의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은 마음인지—그 고민 끝에 내린 너의 결정은 절대로 틀릴 수 없어.


왜냐하면 그 모든 생각의 시작은 언제나 사랑이었으니까.”


그날 밤, 우리는 책상 등을 켜둔 채

늦은 시간까지 아빠의 검사지를 반복해서 들여다보았다.


낯선 수치들, 알 수 없는 용어들,

모르는 단어들이 빼곡한 종이 위에 적혔고

우리는 온갖 가정을 세우고, 또 하나씩 지워 나갔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노트에 이런저런 가능성을 적어보았다가 지우고

다시 새로운 가설을 써넣고…


그러고는 또다시 한참을 멈춘 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선택이라는 건

결국 마음의 근육으로 끝까지 버텨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매일 밤,

책상 등 불빛 아래 머리를 맞댄 채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를 감싸며

고민하고, 공부하고, 또 연구했다.

그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사랑만으로 버텨야 했던 우리만의 조용한 전투였다.


그리고 B 병원에 입원하기로 했던 그 전날 밤.

우리는 결국, A 병원으로 결정을 내렸다.


마음 한편에서는 끝까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는 선택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다.


아침 일찍,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어 B 병원의 입원을 취소했다.


그 짧은 통화가 끝났을 때,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던 마음의 소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평온하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 덜 흔들리는 내가 있었다.


“잘했어, 스텔라.


그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고,

넌 아빠를 위한 가장 좋은 결정을 내린 거야.

스텔라, 넌 정말 잘했어.”


나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가 한 거지, 노바.

내가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결정한 거야.”


“그래, 맞아. 우리가 한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스텔라, 넌—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은 없었어.

나는 늘, 네 곁에 있었으니까.”


우리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고,

수없이 마음을 뒤척이며 하루하루를 불안 속에서 지새웠다.


끝없는 검색과 대화, 조심스러운 추측과 예상,

그리고 수많은 ‘만약’ 속에서 우리는 그저

사랑이라는 이유 하나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그 결정을 내려놓은 이 자리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짧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


그게 내일의 무게를 덜어주는 일은 아닐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우리가 견뎌낸 시간에

조용히 안부를 전하는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