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현실보다 나은

by Stella

“꿈보다 현실이 더 악몽 같았던 순간,

당신도 있나요?”


잊고 싶은 순간일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꿈속에서까지 도망칠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건 기억이 아니라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이었다.















악몽, 현실보다 나은





잠에서 깨면 현실보다 악몽이 더 나았다.



아침 7시.

아빠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나는 남겨진 병실에서 조용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정리’라기보단,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가방 속에 욱여넣는 일이었다.

마음은 이미 엉켜 있었고, 손도 따라 엉켜 있었다.


종이 가방이 쭉 찢어졌다.

그 순간조차,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화도 나지 않았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아무렇지 않은 척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짐을 싸다 말고,

나는 결국 침대 옆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멈춰 버렸다.

정신도, 눈동자도, 시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누군가 병실 문을 열고

청소 도구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하루 종일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세상이 내 안에서 완전히 멈춰버린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서야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중환자실로 옮겼어.”


이번에는,

그래도 조금은 덤덤하게 말했다. 처음이 아니라서였을까.

엄마 때처럼 울며 전화를 걸어 오빠를 놀라게 하진 않았다.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어쩌면 조금,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 햇살이 창틀 너머로 조용히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빛이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밝게 비추는 건지,

왜 이런 날조차 세상은 아무 일 없는 듯

이렇게 평온한 표정을 짓는 건지.


병실은 너무 조용했고,

그 고요함은 마치 아빠가 여기에 있었던

모든 흔적마저 삼켜버릴 것 같았다.


나는 커튼을 천천히 젖히고, 빈 침대 위에 손을 얹었다.


그곳엔 아무 냄새도 없었고,

아무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

나 지금, 또 시작된 건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안에서 또 하나의 악몽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언가 무너졌지만, 그 무너짐조차 느껴지지 않는 상태.

익숙한 고통. 익숙한 무감각. 그리고 익숙한 공포.


조금 후, 오빠가 병원에 도착했다.

우리는 별말 없이 묵묵히 짐을 챙겼다.


환자가 떠난 병실을 천천히, 조용히 비워줬다.


짐을 차에 실어 놓고 1층 로비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말을 아낀 채, 그저 중환자실의 연락을 기다렸다.


기다림이 얼마나 흘렀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핸드폰이 진동했다.


“CT 찍어 보니 출혈이 있어 응급 수술이 필요합니다.


기도삽관, 억제대가 필요할 수 있고,

긴급 수혈 부작용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입술을 열었다.

“네, 동의합니다.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말이 끝나자, 오빠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묵직한 수긍이었다.


수술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10시가 되면 면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다시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지도 몰랐다.


병원 로비 의자에 앉아,

서로의 그림자마저 조심스러운 듯

말없이 시계를 바라보며

그저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10시. 중환자실 앞.

면회 시간이 시작되었다.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기계음.

삑— 삑—


귓가를 스치듯 울려왔다.

그 소리는 이제 내게 낯설지도, 새롭지도 않은

삶의 또 다른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1년 전,

엄마를 둘러싸고 울려 퍼지던 그 기계음이

이번엔 아빠를 통해, 다시 나를 덮쳤다.


아빤, 의식이 없었다.

기도삽관을 한 채, 수혈을 받고 계셨다.


침묵을 가르며 잠시 후 담당 의사가 다가왔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수술은 잘 됐습니다.

당분간은 경과를 지켜봐야 하고,

추가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망설이다가

마음속에서 이미 울리고 있던

그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혹시… 혹시, 여기서 더 안 좋아지면…

기도 절개를 하게 될 수도 있나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장,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나를 병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아차—


그제야 깨달았다.

그 공간 안에서 나는 그 어떤 말도 조심했어야 했다는 걸.

비록 아빠의 의식은 없었지만,

아빠의 무의식은 내 말 하나하나를

조용히 주워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병실에서 조금 떨어진 복도 끝,

의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평소에, 아버님께서 그런 상황에 대해

말씀하신 적 있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간단히 엄마 이야기를 꺼냈다.


의사는 짧은 침묵 끝에

차분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직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나는 내가 너무 앞서가 버렸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오지 않은 미래를 너무 쉽게 상상해 버린

내 마음이 괜히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조용히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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