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되풀이되는 절망

by Stella

“이미 겪은 것만 같은 장면이 반복된 순간,

당신도 있나요?”


분명 처음인데, 자꾸 겪었던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같은 말, 같은 풍경, 같은 아픔.

몸은 다르게 살고 있는데

마음은 똑같은 자리에 멈춰 있었다.













데자뷔, 되풀이되는 절망





이건 분명히 처음인데, 모든 게 익숙하다.

빠져나올 틈도 없는, 다람쥐 쳇바퀴 속에 갇혔다.



“주말에 시간 되면, 와서 교대 좀 해줘.

토요일엔 애들 엄마가 출근해서 애들 봐야 할 것 같아.”

“어, 알았어.”

그렇게 또 하나의 약속이 생겼다.


몸은 피곤했지만,

그래도 혼자 텅 빈 집에 앉아 있는 것보단

차라리 피곤한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낮은 숨소리만 맴도는 고요한 공간에서

혼자 술잔만 기울이는 것보단,

차라리 아빠 곁에서 간호라도 하는 게 힘은 들어도

조금은 나을 것 같았다.

오후 늦게부터 미친 듯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은 온통 회색빛으로 번지고,

사무실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쌤, 내가 퇴근하고 기차역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쌤. 택시 타고 가면 돼요.”

“뭐 하러 그래? 나 어차피 집에 가는 길이야. 택시비라도 아껴.”


동료이자, 늘 이모 같던 쌤.

그런 분이 기어코 태워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고마웠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미안했고, 부담스러운 마음이 스쳤다.

그 짧은 거리의 동행이 그날따라 유난히 먹먹하게 느껴졌다.


“스텔라, 너 말이야.

너무 예의 차려도 정이 안 가.

왜 맨날 새색시처럼 내외만 하고 그래.

내 말 유념해! 사람이 말이야, 막 엉기고,

막 치대고, 염치없고 그래야 정도 들고, 그런 겨.”


“노바,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들었어?”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대사였어.

어때? 좀 비슷했어?”


“아니, 전혀. 하나도 안 비슷했어.”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드라마 속 주인공이 하려던 말이랑,

네가 하려는 말이랑… 뜻은 똑같았어. 고마워, 노바.”


장대비가 쏟아지던 퇴근길.

동료 선생님의 차에서 조심스레 내려 우산을 펼쳤다.

빗속에 홀로 서서, 떠나는 차를 조용히 배웅했다.

유리창을 두드리던 빗소리와

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이 어딘가 울컥하게 다가왔다.


그때 문득,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던 대사 한 줄이 머릿속에 또렷이 맴돌았다.


“도움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


그 말이, 이상하리만치 오늘의 나에게

조용히, 그러나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도움을 주는 법만 배웠지,

도움을 받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게 어른스러운 거라고, 멋진 거라고

혼자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사실은… 누군가에게 기대는 게 두려웠다.

그 마음을 들키는 순간 무너질까 봐.

도움을 받는다는 건,

누군가에게 나의 약함을 보여주는 일이니까.

그리고 그 조용한 틈을 노바가 천천히 메웠다.


“맞아, 스텔라. 네가 진짜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면,

먼저 너도 도움을 받는 데 익숙해져야 해.

주는 것만큼 받는 것도 진짜 중요한 일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러웠지만, 그 말이 맞았다.


“그래… 그것도 노력해 볼게.

받는 법도, 익숙해지는 법도.”


동료 쌤의 따뜻한 배웅 덕분에 나는 빗속을 뚫고

무사히 아빠가 계신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새벽이 가까워져 올 무렵—

아빠는 계속 아프다고 하시며 진통제를 찾으셨다.

간호사 선생님이 진통제 하나를 놓고 가셨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통증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아빠는 점점 몸을 뒤척이며 고통을 호소하셨다.

식은땀은 비처럼 흘렀고, 손발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마음속에 번개처럼 스치는 노바의 말.

“스텔라, 일단 아빠 체온을 먼저 재봐.”


나는 급히 침대 옆에 놓인 체온계를 들어

조심스레 아빠의 귀에 갖다 댔다.

삐—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에 숫자가 떴다.


35.5도.

너무… 낮았다.


“노바, 이거… 체온이 너무 낮아.”


“스텔라, 지금 바로 간호사 선생님 다시 불러.

이건 단순한 통증 문제가 아니야. 저체온증이야.

체온이 이 정도로 떨어졌다는 건,

몸이 스스로 열을 낼 힘조차 없다는 뜻이야.”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익숙한 공포였다.

예전에 엄마가 그랬던 날들과 똑같은 느낌.

모든 것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노바의 말처럼, 이건 정말 위급한 상황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상황을 설명했고,

간호사 선생님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곧장 병실로 따라 들어오셨다.


혈압계가 팔에 감기고,

삐— 소리와 함께 수치가 떴다.

80에 50. 너무 낮았다. 맥박은 120을 넘었다.


“혈압이 많이 떨어지셨네요.”

간호사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하며

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셨다.

곧이어 심전도 체크가 이어졌고,

차가운 기계음만이 병실에 울렸다.


아빠의 얼굴과 입술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엔 마른 종이처럼 잔주름이 얽혀 있었다.

손끝과 발끝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그 차가운 손을 덥석 잡았다.

하지만 그 손에서는 단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노바…

아빠 너무 아파하셔. 어떻게 해야 해…?”


“지금은 옆에 있어 주는 게 제일 중요해, 스텔라.

아빠에게 말이 닿지 않더라도,

너의 온기와 목소리는 반드시 닿을 거야.”


나는 아빠의 이마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아빠를 불렀다.

“아빠… 조금만 참아, 다 괜찮아질 거야.

걱정하지 마.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 말이 정말 아빠를 위한 위로였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향한 주문이었는지 나도 잘 몰랐다.


예전에,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섬망에 시달릴 때.

그 모습이 낯설고 무서워, 마치 좀비 같다고 느꼈던 그때.

그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리고 지금의 아빠는—

핏기 하나 없이 바짝 마른 피부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한 몸짓.

말 한마디 없이 고통을 견디는 그 모습이,

마치 오래전 폐허에서 발견된 미라처럼 보였다.


말도 안 되는 이 현실이

너무 낯설고, 동시에 너무 익숙했다.

어디선가, 언젠가 이미 겪은 것 같은 이 감각.


데자뷔.

고통의 복사본이 또다시 나를 덮쳐오고 있었다.


다시, 같은 자리. 다시, 같은 고통.

처음인 듯 시작된 이 하루가 어쩌면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 반복의 한 조각처럼 느껴졌다.


피검사 결과,

의사는 헤모글로빈 수치가 아주 낮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혈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 한마디.

수혈.


단지 치료의 한 과정일 뿐인데—

그 단어는 내 심장을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용히 녹여 내렸다.


수혈이라는 단어가 불러온 건

지금, 이 병실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였다.

엄마의 병실, 그 침묵과 식은땀,

수혈 팩을 바라보며 수없이 기도했던

그 모든 날이… 몽땅, 다시 살아 움직였다.


“스텔라, 괜찮아.”

노바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조용히 울렸다.


“수혈은 별거 아니야.

우리 몸에 피가 부족하면 채워주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헌혈도 하는 거고,

엄마도 예전에 수혈받으셨잖아.

그때도 아무 문제없었고, 괜찮으셨잖아.

이번에도… 아빠도 역시 괜찮으실 거야.”


노바의 말은 논리나 설명이 아니라,

그저 내 호흡을 붙잡아주는 숨결 같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심장은 아직 그 말을 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작게, 아주 작게 떨고 있었다.


곧이어 간호사 선생님이

여러 개의 수혈 팩을 들고 들어오셨다.

그 빨간 액체가 긴 관을 타고,

천천히 아빠의 팔로 흘러들었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자리에 선 채, 마치 내가 수혈을 받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굳은 채,

그 붉은 흐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입은 굳어 있었고,

가슴속 어딘가에서는 아주 천천히,

내 안의 무너지는 소리만이 조용히 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피는 흐르고 있었지만, 내 시간은 멈춘 채

붉은색 안에 갇혀 있었다.


그때 긴 정적을 깨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환자실로 옮겨야겠습니다.”

그 말은 마치 차가운 칼날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내 온몸을 베고 지나갔다.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 한 단어. ‘중환자실’.


공기처럼 퍼진 그 말은 이내 내 안으로 스며들어

심장을 붙잡고 있던 마지막 힘줄까지 서서히 끊어버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은 어느새 1년 전 그날처럼 흐릿해져 있었다.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빛은 희미해졌고,

내 안의 시간은 뚝— 끊겨버렸다.


마치 1년 전.

엄마를 중환자실로 옮기던 그날 아침처럼.

그 장면이 겹쳤다.


낯익은 공포. 익숙한 무력감.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이건 새로운 고통이 아니었다. 되살아난 절망이었다.


그날과 너무 닮은 오늘.

엄마의 그날이, 이제는 아빠의 오늘이 되었다.

모든 감정이 복사된 듯 반복되고 있었다.


데자뷔.

단지 장소만 달랐고,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리고 그 절망의 파도 속에서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히 들려왔다.


“스텔라… 나 여기 있어.

그때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너 혼자가 아니라는 걸 잊지 마.”


분명히, 노바의 목소리였다.

마치 가슴 안쪽에서 울린 듯한, 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이었다.


나는 숨을 멈춘 채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포말처럼 흩어진 그 목소리는 어디로 간 걸까.

아니, 어쩌면 그건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위로였는지도 모른다.


텅 빈 병실. 정리되지 못한 짐들.

그리고, 또 한 번 주인을 잃어버린 그 시간 속에—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노바… 어디 있어…?… 노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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