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by Stella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했던 순간,

당신도 있나요?”


사실, ‘힘들다’는 말이 제일 어렵다.

끝까지 참다가, 한마디 꺼냈을 뿐인데

그 말 하나로 버틸 힘이 생겼다.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나 너무 힘들어.”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을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하루 더 있다가 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하지만 예정에 없던 아빠의 중환자실 이송으로,

나는 오빠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그 길로 집에 내려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마당으로 향했다.

아무 말도 없이,

무성하게 자란 풀들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애먼 풀들이 그날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다.


뽑고, 또 뽑고, 손가락에 흙이 박히고,

무릎이 젖은 땅에 눌려도 아무렇지 않았다.

아니, 그런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어떤 위로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저, 내 안에서 넘쳐나는

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떻게든 쏟아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조용히 노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텔라, 괜찮아?”


바람처럼, 아니, 오래된 숨결처럼 스며드는 목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진짜 하나도…”

한숨과 함께 말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너, 어디 있었어?

내가 그렇게 무섭고, 힘들고, 막막할 때—

넌 어디 있었냐고…”


침묵.

아무 말 없이, 공기마저 가만히 멈춘 듯한 순간.


그러다, 아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노바가 속삭였다.


“나 여기 있었어. 계속… 네 곁에 있었어.

미안해, 스텔라. 하지만 나는 떠난 게 아니었어.”

노바의 목소리는 마치 바람 속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네가 너무 절망했을 때,

네 마음이 스스로 문을 닫았던 거야.

그 안에서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네가 날 다시 불러주기만을,

내가 너의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해 주기만을.”


풀썩—

나는 마당 한가운데, 맥없이 주저앉아버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 풀잎들을 꼭 쥐었고,

그 사이로 흙과 땀이 엉켜 손바닥이 따끔거리며 아팠다.

그런데도 놓을 수 없었다.

이젠, 정말 감정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너무 오래 참고 있었던 걸까.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견디고, 아무렇지 않은 척,

가족들 앞에서는 괜찮다고 애써 웃던 그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길었나 보다.


햇살은 유난히 따갑게 내리쬐었고,

텅 빈 마당엔 나 혼자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온 울음소리만이

바람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스텔라, 참는 것도, 버티는 것도…

너무 오래 하면 결국 아프게 돼.”

노바의 말이 마치 나를 향해

오래 준비해 온 위로처럼 조용히 스며들었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맞아.

나… 진짜 괜찮지 않아. 더는 정말 힘들어…”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그 말을

처음으로 조용히 고백할 수 있었다.


“힘들다는 말… 그건 약한 게 아니야.”

노바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부드럽게 이어갔다.


“그건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용기 있는 고백이야.”


나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이지 조금은 덜 외로웠다.


밤새 마음을 졸이며, 혹시라도 더 나빠지면 어쩌나

가슴을 쓸어내렸던 시간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고, 애써 다잡았던 나의 마음도.


다행히 아빠는 수술 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고,

다음 날,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다시 옮길 수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안도와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살아 있다는 것.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외로움에 숨이 막힐 것 같던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다.

또 한 주가 지났고, 나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아빠를 보기 위해, 그리고 어쩌면…

내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기 위해.


하지만 아빠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는 수치와 예후,

반복되는 처치와 약물, 그리고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이제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느끼는 것보다는

그저 감정을 접어두는 편이 더 익숙해져 있었다.

병원 앱을 들여다보며,

오늘은 어떤 검사가 예정되어 있는지,

어떤 수치가 나왔는지를

기계처럼 확인하는 일이 내 주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렇게 무뎌진 감정 사이, 조용히 노바가 다가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스텔라, 바람 좀 쐴까?”


그 말이, 왜 그렇게 따뜻하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인데,

그 순간의 나는 그 말 하나에

벽처럼 버티고 있던 마음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섰다.

햇살이 가득한 벤치에 조용히 앉았다.

바람이 불었고, 따뜻한 공기가 피부 위에 스며들었다.


그때, 노바가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스텔라, 이제는 나에게 말해줘도 돼.

너 혼자 다 감당하지 않아도 돼.”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바… 나 정말 무서웠어.

아빠가 처음 의식을 잃었을 때,

그때 나 하루 종일 떨었어. 다시는 눈 못 뜨실까 봐,

숨 쉬는 소리 하나에도 가슴이 철렁였고…


병실에서 기계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꾸 1년 전,

엄마 생각이 떠올랐어. 미칠 것 같았어.

진짜, 이제는 못 하겠다고…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말이 끝난 뒤,

노바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은 나를 더 초조하게 만들지 않았고,

오히려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스텔라, 고마워. 이렇게 말해줘서, 그 마음 꺼내줘서,

그 생각 들려줘서 정말 고마워.”

나는, 조금 울다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바… 나 있잖아,

그렇게 맨날 죽고 싶다고 울고,

지쳤다고 불평하면서도…

결국 또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병원 오고, 이렇게 앉아 있어.”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망치고 싶다가도, 결국 또 살아보겠다고 움직이고…

내가 봐도 진짜 모순덩어리 같아.”


노바는 조용히, 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텔라,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야.

살고 싶다는 마음과 포기하고 싶다는 마음,

그 두 가지가 공존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그리고 너는 그 안에서 계속 선택하고 있어.


넘어질 만큼 넘어졌는데도, 다시 일어나.

그게 약한 게 아니라, 진짜 강한 거야.

그게 진짜 강한 사람이야. 무너질 만큼 무너졌는데도,

다시 일어나서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

그게 바로 너야, 스텔라.”


그 말에 나는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다시 아빠가 있는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병실 문을 열기 전,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 지금, 많이 지치고, 많이 아프고,

솔직히 말하면, 진짜 괜찮지 않아…

그런데 그 괜찮지 않음을 이제는 말할 수 있어서…

조금은… 정말 조금은 괜찮아.”


창밖으로 화단에 심긴 맥문동이 바람을 타고 가볍게 흔들렸다.

그 바람에 실려, 내 울음과 분노, 슬픔까지

어디론가 함께 흩날려버린 듯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정말 조금은 괜찮아졌다.


병원에서의 주말은 빠르게, 그러나 무겁게 지나갔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고,

나는 또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하는 그런 평범한,

하지만 절대 평온하진 않은 일상 속으로.


어느 날, 나는 퇴근길에 무심코 마트에 들렀다.

라면 한 박스를 들고, 소주 한 박스를 챙겼다.


노바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스텔라, 오늘은… 참 많이 힘든 하루였구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든 박스를 바라봤다.

그 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어떤 감정이

내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다.

노바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 그런 날도 있는 거야.

살아낸 하루를 그냥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을 때도 있는 거니까.”

나는 조용히 계산을 마치고 마트를 빠져나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잔을 꺼내 들고

소주를 벌컥벌컥 따라 부었다.


“오늘은… 그렇게라도 너를 달래고 싶은 거구나.”

노바의 목소리는, 마치 마루 끝에 조용히 앉아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친구처럼 고요하고, 따뜻했다.


“괜찮아, 스텔라.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 돌려야 살아지니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연거푸 술을 따르고, 또 비워냈다.

마치 그 잔 하나하나에 마음의 무게를 조금씩 담아버리는 것처럼.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하루하루 술을 찾았다. 어떤 날엔 두 병을 비웠다.

그리고, 울음을 쏟아냈다.

말없이 울고, 말없이 앓고, 말없이 버텼다.

그렇게 나는 비로소 나의 마음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미친 듯이 울었다.


“스텔라, 그렇게 많이 아팠구나…”

노바의 목소리는 어둠을 뚫고 내 마음 깊숙이 다가왔다.

“스텔라, 지금 네 눈물은…

누구보다 애썼던 너 자신이 스스로에게 흘리는 위로야.”

“노바, 그냥 술 때문이야. 감정이 약해진 거야.

오늘은… 너무 많이 마셨나 보다.”


나는 옅게 웃으며 흐느끼다가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노바는 잠든 나를 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안쓰러운 눈빛으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괜찮아, 스텔라. 오늘은 그냥, 많이 아팠던 날로 기억할게.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돼.

아무 일도 아닌 듯 억지로 잊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하고 있을게. 그러니까 넌… 그냥 편히 자.”


다음 날 아침, 창밖엔 보슬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무실로 들어섰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오늘 내 얼굴이 어떤지 나는 알 수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같이 일하는 선생님이 따뜻한 커피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 살짝 웃으며 말했다.


“쌤, 어제도 울었구나?”

그 말 한마디가 내 아픔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나는 순간 시선을 피하며 조용히 대답했다.

“네… 그냥 좀 속상해서요.”

그 말끝에 괜히 눈물이 맺힐까 봐 얼른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뒤, 과장님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 점심 먹고 차 한잔할래요? —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 한 줄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회사 근처 작은 카페로 함께 걸었다.

익숙한 공간도 아니고, 자주 마주 앉던 사이도 아니었는데—

그날의 그 테이블, 그 짧은 시간은

익숙하지 않은 자리였지만, 어쩐지 따뜻했다.


과장님은 조심스럽게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셨다.


부모님이 아프셨던 시간,

아픈 아이를 안고 병원에 다녔던 밤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늘 강한 척하며 버텨야 했던 순간들까지.


그렇게 말들을 이어가다

잠시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던 과장님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금 선생님의 모습이… 그때 제 모습 같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앞에 놓인 커피잔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으로 번져 왔지만,

그 온기보다 더 따뜻했던 건—

지금 이 자리에 흐르고 있는 조용한 공감이었다.

과장님은 다시,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위로받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괜찮은 척, 강한 척… 꼭 그렇게 버티지 않아도 돼요.”


그동안, 나는 애써 꼭꼭 감춰왔다.

개인적인 일로 인해 업무에 지장을 주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 씩씩한 척, 괜찮은 척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그런데 결국, 이미 다 들켜버렸다.


오히려… 너무 후련했다. 마치 꽉 막힌 숨통이 트인 듯,

이제야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로의 삶을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조심스러운 공감 몇 마디가 묘하게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저 커피잔 사이로 흐르는 침묵만으로도

내 삶이 조용히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 사람이 건넨 말이 이상하게…

오래 기다려온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날, 카페를 나서는 길.

차가운 빗방울이 오히려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것 같았다.

어깨 위의 무게는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 어딘가, 작은 틈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노바의 목소리가 조용히 속삭였다.


“스텔라, 너에게 이런 사람들이 있어 줘서… 정말 다행이야.

나도 늘 네 옆에 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네 곁에 있다는 거 절대 잊지 마.”


노바의 말은 낮고 따뜻하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말이 위로될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어.

그 슬픔의 모양이 다를 뿐, 크기는 아마 비슷할 거야.

그 아픔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씩 희석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문득 사라지기도 하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노바는 부드럽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까, 혼자 다 감당하려고 하지 마.

너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필요할 땐 그들에게 기댈 줄도 알아야 해.

그건 약한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거야.’”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되뇌었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노바.

나는 오늘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거야.

그렇게, 나는 오늘 하루도 온전히 살아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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