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살아나는 곳 : 숨결식당

9장. 길을 걷는 법

by 대성림

9장. 길을 걷는 법


비가 그친 뒤였다. 골목 바닥에는 물이 남아 있었다. 작은 웅덩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하늘은 아직 흐렸다. 빛은 약했고 공기는 눅눅했다.


식당 문 앞에서 남자가 앞치마를 벗었다. 걸이에 걸고 잠깐 서 있었다.

“같이 좀 걸을래.”

물음이라기보다 건네는 말에 가까웠다.


로운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젖어 있었다. 끈 사이로 물이 묻어 있었다.

“네.”

작게 말했다.


둘은 나란히 골목을 나섰다. 말은 없었다.


찰박.
찰박.

물기를 밟는 소리였다.


처음에는 조금 빨랐다. 습관처럼. 어디로든 가야 할 것처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금 뒤처졌다.

어느 순간, 로운이 먼저 속도를 줄였다. 자기도 모르게.


몇 걸음쯤 갔을 때였다.

“발부터 좀 봐.”

남자가 말했다.


로운은 멈췄다.

“뭘요.”


“딛는 거.”


로운은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별다를 게 없었다. 늘 하던 대로였다. 뒤꿈치부터 앞으로 밀었다.


“지금은 그냥 걷고 있어.”

남자가 말했다.


“한 번만 다르게 해 봐.”

바닥을 가리켰다.

“느끼면서.”


로운은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이번엔 천천히.

뒤꿈치. 발바닥. 발가락.

순서대로 닿았다. 머릿속으로 세며.

처음엔 어색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자꾸 빨라졌다. 자꾸 흐트러졌다.


“멈추지 말고.”

“틀려도 돼.”

“알아차리면 돼.”


로운은 다시 걸었다. 조금 더 느리게.


아스팔트의 거칠음이 발바닥에 닿았다. 차가움도 느껴졌다. 물기가 스며드는 느낌도 있었다.

전에는 없던 감각이었다.

있어도 몰랐다.

지금은 하나씩 올라왔다. 종아리까지. 허벅지까지.

몸이 이어져 있었다.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자연스럽게. 내쉬었다.

걸음과 함께.

발. 숨. 리듬.

셋이 조금씩 맞아갔다.


몇 분쯤 지났을까. 이마에 땀이 맺혔다. 차갑지 않은 땀이었다.

몸 안에서 올라온 온기였다.


“이상해요.”

로운이 말했다.


“뭐가.”


“걷는 건데… 되게 어려워요.”


남자는 웃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원래 그래.”

“자기 몸이 제일 어려워.”


작은 공원까지 걸었다. 벤치에 앉았다.

숨이 조금 찼다. 하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가슴이 먼저 막혔을 것이다.

지금은 천천히 내려왔다.


남자가 물병을 건넸다.

“마셔.”


로운은 한 모금 마셨다. 물이 목을 적셨다.

이번엔 끝까지 내려갔다.


“요즘 좀 어때.”

남자가 물었다.


로운은 잠깐 생각했다.

“전에는….”

말이 멈췄다.

“몸이 없는 것 같았어요.”


남자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지금은….”

잠깐 숨을 골랐다.

“있는 것 같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시작이야.”

“다른 건 나중이고.”

“일단.”

바닥을 톡 쳤다.

“여기부터.”


로운은 그 자리를 보았다.

젖은 흙. 작은 돌. 낙엽 하나.

별거 없었다.

그래도 발이 그 위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이었다. 식당 문을 닫고 난 뒤였다.


골목은 어두웠다. 끝 쪽 불빛만 남아 있었다. 주방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남자는 계산대를 닦다가 멈췄다. 손을 씻고 서랍을 열었다. 깊숙한 칸이었다. 잘 열지 않는 곳.


작은 금속 상자를 꺼냈다. 긁힌 자국이 많았다. 모서리는 닳아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얇은 패드 하나. 낡은 종이 몇 장.


남자는 그걸 바로 펼치지 않았다. 먼저 손끝으로 종이 모서리를 한 번 눌렀다. 마치 확인하듯.

그리고 패드를 켰다.


잠깐의 어둠.

글자가 떴다.


『보이지 않는 길의 기록』


로운은 자세를 고쳤다. 자기도 모르게.


남자가 말했다.

“이건… 혼자 들고 있으면 다시 무너져.”

설명은 짧았다.


로운이 물었다.

“누가 쓴 거예요.”


남자는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누렇게 변한 메모였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늘은 숨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걷다가 멈췄다.
발이 바닥에 닿아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로운은 그 문장을 오래 보았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이 사람도… 힘들었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무너진 다음에 와.”


패드를 넘겼다.

비슷한 문장들이 이어졌다.

짧고 담담한 기록. 실패한 날들. 넘어졌던 날들. 다시 일어난 흔적.


남자가 말했다.

“이제부터는 읽는 게 아니야.”

“네 걸로 써.”


로운은 화면을 다시 보았다.

글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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