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말대로 하면 돼?

이른 아침이나 한밤중 전화는 사양이오~

by 윤슬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에 전화벨이 울린다. 큰아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다.

거긴 이른 아침일 텐데 무슨 일일까?

밤새 고민하다가 일어나자마자 전화했을 게 분명할 터, 순간 망설여지는 내 마음.

살짝 마음을 누그러뜨리며 밝게 목소릴 낸다.

"어, 아들 잘 지내?"

"응, 엄마"

어째 목소리에 주저함이 묻어난다.

"엄마 근데, 어, 그게 말이야..."

어쩐 일인지 나는 대뜸,

"왜, 여자 친구가 임신이라도 했어?"

이 말이 그 순간 왜 불쑥 튀어나갔는지 지금도 이해불가다.

아니, 어쩌면 유학 보낸 아들을 둔 모든 엄마의 불안요소 1위여서 인지도 모른다.

아이는 급작스런 물음에 놀라며,

"응" 한다

"엄마, 실망시켜서 미안해"

'미안할 짓은 왜 했니? 그러게 절대 그런 일 만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네 인생이 얼마나 꼬이는지 몰라서 그랬어? 공부하라고 보내놨더니 혼전임신이라니 창피해서 어쩐대...' 등등

이렇게나 짧은 순간에 그렇게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아이는 풀이 죽어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없는데 난 그저 어이없는 웃음만 짓는다.

어쩌면 제 행위를 반가워라도 하는 모양이라고 아들이 착각할 정도의 웃음소리를 내며,

미친 사람이 왜 실실 웃고 다니는지 정신이 혼미해지니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든다.

"아빠에게 어떻게 말하지? 뭐라고 하실까?" 근심 가득한 아이의 한숨

"뭐라 하긴 당연히 낳아야 한다고 하시겠지."

"걱정하지 마. 아빠한텐 엄마가 말씀드릴게."

걱정하지 말라니, 이런

남편에겐 물어보나 마나다.

아이가 언젠가 "혹 임신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었을 때,

"나쁜 생각하지 말고 당연히 책임져야지."라고 한 남편이다

나도 거기에 물들었는지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난 이 순간의 나를 원망하곤 했다.

거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잖아, 이 멍청이야!

물론 지금은 아니다. 결단코


걱정하지 말라는 내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저희끼린 벌써 나쁜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며 엽산을 먹고 어쩌고...

제 아빠의 가르침을 아주 잘 실천하고 있음을 전한다.

애는 애구나 싶다. 순식간에 걱정 따위는 천리 밖으로 던져버리고 재잘거리다니 대단하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와의 통화는 끝났다.

다소 담담하게 대구 하던 난, 그때부터 답답함과 황망함으로 기가 막혀온다.

그런데 천성이 오랜 고민 따위는 못하는 지라 금세,

'그래 이왕 벌어진 일, 혼인부터 시켜야겠다.'며 마음이 바빠진다

자다 일어난 남편은 이 소란에도 밑도 끝도 없이 좋아라 한다

"어쩐지 그런 걸 묻고 하더니..."

'이 양반아 이게 마냥 좋아할 일이냐고요'

에라 모르겠다.

일단 한 잔 하며 생각을 해 보자고요.

늦은 밤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기 시작한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부모를 닮는 건가?"

"그게 유전도 아닌데 뭘 닮아요? 그리고 우린 아버님이 몸이 안 좋으시니 그리 된 거고"

"외할머니가 그렇게 결혼 늦게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말 참 안 들어"

"공부도 덜 끝났는데 뭘 어쩌려는 건지"

"너무 일찍 가장의 무게를 질 필요 없으니 결혼은 천천히 하라고 당부했건만"

"결혼하고도 2~3년은 살아보고 애는 가지라고 했는데, 이런"

"98%의 확률로 피임효과가 있다는데 그 2%를 뚫었다니 대단한 녀석인 걸."

"불량제품이나 만들고 확 고소할까 보다"

두서없는 이야기가 술잔의 맥주거품처럼 올랐다가 사라져 버리기를 수차례.


"난 아직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는데..."

울컥 내뱉은 남편의 말에 나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그거였다.

상황에 떠밀려하는 결혼으로 인해 인생의 많은 기회와 계획과 시간들을 놓치게 될, 안타까운 너 때문이었어.

아무런 원망 없이 넌 네 삶을 잘 살아갈 준비가 되었니, 아들아!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