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PO에 맞게...
남편은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밥 사준다고 데려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난 만남이 곧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닌데, 아들의 여자친구와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굳이 만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질색을 하는 편이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러냐고. 서로가 불편하며 불필요한 만남이라고 누누이 말해줘도, 남편은 아들의 여자친구란 말을 듣기만 해도 좋은지 밥이라도 사주고 싶은 심정인가 보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 순간, 남편의 말을 들었었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잠시 스친다.
한 치 앞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사람 일이란 참...
지금 나는 과거의 나를 꾸짖으며, 세 살 연상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일면식도 없는 아이의 부모를 곧 만나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요새는 상견례도 결혼식 당사자가 양가의 부모를 초대하여 이루어진다던데, 초대는커녕 주인공도 없는 자리에 우리끼리만 마주하게 됐다.
통화한 지 나흘 만에 도산공원 근처의 적당한 일식당에서 초면의 두 부부가 만났다.
짜잔~ 하기엔 서로가 어색하고 반가워하기엔 면구스럽기도 한 이들이 모여 이게 무슨 일이고?
세상일에 무심하여 너른 마음으로 학점 잘 주실 것만 같은, 교수님인 J 아버지와 지나치게 유쾌하고 솔직한 J어머니 그리고 뭐든 수용할 듯이 사람 좋은 미소를 띤 H아빠인 남편과 깐깐한 속내를 숨기고 유순함을 장착한 H엄마인 나.
아이들 덕분에 살아가면서 서로 마주할 연결고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모였다.
첫 만남이 조심스러우면서도 얘깃거리는 넘쳐난다.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무하니 당연한 일이다.
"우리 애가 나이만 많았지 공부 말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어쩌면 H보다 더 물정을 모를 거예요."
"우리 애도 아직 어린데 큰일이네요."
"학업도 계속해야는데 아기는 어떻게 키울는지 걱정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J어머니는 두 딸을 우리나라의 최고명문인 학교에 보낸 학구열 넘치는 엄마답게 혹여 J의 학업이 늦춰질까 불안함을 드러냈다.
본인이 큰 병에 걸렸는데도 딸들 학업에 지장이 있을까 봐 숨기고 치료도 미뤘었다 전하는 말에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기는 했다(현대판 신사임당이 삶의 모토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두 딸이 당신의 가장 큰 성취라 생각하는 듯했다.
뭣이 중헌디는 각자의 판단이니 딱히 뭐라 할 말은 없다.
"육아야 애들이 감당해야 할 부분 아니겠어요. 출산 후 한 학기는 J가 휴학을 하고, 그 후엔 H가 졸업을 하니 베이비시터 도움 받아가며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내년에 J아빠가 안식년이고 지금 봐주고 있는 손녀도 어느 정도 컸으니 그때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산후조리는 J만 괜찮다면 잠깐이니 제가 해 줄 수도 있어요."
중단 없는 학업을 말하는 J어머니께, 난 J의 회복과 아이의 안정된 보살핌이 우선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우리나라에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누리며 살다가 학생보험이라는 최소한의 보호를 받으며 임신의 과정을 보내야 할 열 달이, 결코 짧지 않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모두 기우에 불과했다). 더구나 친정엄마가 해주신 산후조리가 더 편했던 경험을 가진 내가 굳이 J의 산후조리를 자처한 이유는 소문이 흉흉한 미국의, 출산 직후 찬물샤워 때문이 아니라 그곳에는 한국식의 산후조리원이 없어서 출산 후 가정에서 회복에 힘써야 한다는데 , 마침 J엄마가 형편이 안 된다 하셨기 때문이다.
한국이었다면 산후조리원비를 쾌척한 멋진 시부모 역할에 만족했을 터이다.
여하튼 아들의 결혼은 모든 게 내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들 H를 잘 보듬으며 가정을 살뜰히 돌볼 여성과 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현실은 자아실현이 목표인 J가 짝꿍이다.
J의 학업이 잠시라도 중단되지 않는 선에서 출산과 그 이후를 생각하는 분들과 그게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미묘한 입장 차이.
미묘하다는 정도로 갈음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예정에 없던 일이 생긴 건 모두에게 마찬가진데, J만은 정해진 길을 계획대로 가길 원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한다?
이러나저러나 내 속만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다.
정작 주인공은 배역 파악이 안 되어 세상물정 모르고 있는데, 매니저들끼리 북 치고 장구치고 볼 만하다.
얘들아, 생각 없이 알콩달콩 티격태격 지내니 좋으니?
하루빨리 현타가 오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고 사부인, 우리 제발 TPO에 맞게~~
어떻게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