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신호는 짧고
보도블록을 차는 구두 굽 소리들은
각자의 앞날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진 시선들이다
속도가 유일한 경전(經典)인 거리에서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발등 아래
반쯤 접힌 노인이 파도에 밀리듯 건너오고 있었다
그는 지팡이 대신 허공의 모서리를 짚었다
마디마다 박힌 침묵이 식어가는 정맥을 누를 때
스치고 지나가는 외투들의 서늘한 마찰음 속에서
노인은 혼자 썰물에 고립된 바위처럼 작아졌다
그때, 마주 오던 정갈한 정적이 멈춰 섰다
단정하게 여며진 단추들, 흔들림 없는 소맷동
수직의 세계를 고집하던 외투의 결이
노인의 낮은 궤적을 향해 부드럽게 굴절되었다
그것은 짧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生)을 기울여
노인의 무너지는 팔꿈치 아래로 고요히 밀어 넣었다
단단한 무릎과 마른 뼈가 만나
가파른 지붕의 형상을 이루는 찰나
부축하는 두 팔의 결합은
허물어지는 사원을 받치는 서까래였으므로
여인의 몸에 배어 있던 정돈된 온기가
식어가는 노인의 골목으로 투둑, 이양되는 소리
그녀의 어깨는 굽은 등을 지탱하는
가장 세련된 각도의 쐐기였다
비로소 노인은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자신의 보폭만큼 남은 길의 끝을 응시했다
접혔던 척추 마디마디로 수액이 차오르듯
옅은 경련이 일어났고, 기울어졌던 세계는
낯선 어깨 위에서 잠시 수평을 되찾았다
나는 여전히 횡단보도 중간에 고립되어 있다
한 번도 펴본 적 없는 마음의 주름이 무거워
건너가야 할 길보다
남겨진 발자국이 먼저 부끄러워지는 시간
신호가 바뀌어도 나는 차마 발을 떼지 못한다
정돈된 무릎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존재의 높이를 주워 올리는 동안
거기,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을 메우는 건
꽃잎이 아니라 두 존재가 맞닿아 만들어낸
단 하나의 눈부신 사선(斜線)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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