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 나 할머니랑 자고 싶어...

어쩌다 여기까지, 아이의 시간

by 밤결




때아닌 황혼육아는 부모님의 삶을 바꾸어 갔다.


어머니는 인근 경찰서에서 시민경찰로 활동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 동네 순찰을 돌았다.

아버지는 정년퇴직 후 전국을 돌며

그동안 밀린 등산을 숙제처럼 하고 있었다.


그런 부모님의 일상에

갑자기 5살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아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TV를 보면서도, 대화를 하면서도 콩콩 뛰었다.

부모님의 시선은 온통 아이에게로 돌아갔고,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어머니는 약간 싱거워 보이는 허여멀건한

미역국을 한 솥 가득 끓여냈다.


하얀 밥에 소시지를 준비하고는,

우다닥 뛰어가는 아이를 붙잡아 식탁에 앉혔다.

식사 후에는 널브러져 있는 미역국의 잔해를

정리하고는 설거지를 하러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아래층인데요....>


날카로운 알람이 울렸다.

아버지는 아래층에서 걸려온 인터폰을 받고는

빛바랜 외투를 챙겨 입고 아이와 놀이터로 향했다.


아이가 나간 사이

어머니는 동료 시민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부모님은 아이가 들어온 바뀐 일상을

생각보다 잘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버지도 등산가방 대신 작은 배낭을 메었다.




집 안의 시계가 아이의 시간으로 맞춰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모님은 아이가 깰라

침대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이는 TV를 켰다.

점심식사 후에는 집안의 불이 꺼졌고,

아이는 낮잠에 들었다.


아이는 금방 할머니 집에 녹아들었다.

등산은 못 갔지만, 아버지의 웃음소리도 커졌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모처럼 연차를 내고

키즈 풀빌라를 예약했다.


바쁜 일정 끝에 겨우 잡은 이틀이었다.

우리에게 조금은 비싼 선택이었다.


풀빌라에 도착하자

두 아이는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뛰어들어갔다.


물속에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유리창 너머까지 들려왔다.


아내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고

나는 저녁을 준비했다.

오랜만에 밥상이 가득 차보였다.




아이들이 눈을 비볐다.

우리는 아이를 씻기고 침대 위에 눕혔다.

불을 끄자 정적이 찾아왔다.


잠시 후...

처음엔 잠꼬대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괜찮아, 하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그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할... 머니랑 자고 싶어.”




등을 두드리던 손이 잠시 멈췄다.

아내는 그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처럼 말했다.


“엄마 아빠 여기 있어.”

아내는 부드럽게 말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울음이 더 커지지는 않았지만 멈추지도 않았다.

아이는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내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바라보고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하필 낯선 이곳이었을까.

아이의 울음소리가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내는 다시 아이를 안았고

그날 밤, 다시 켜진 불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시리즈는

각각의 글 하나로도

읽고 즐기기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전 글을 함께 보시면

더 깊게 즐기실 수 있습니다. by 밤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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