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못하는 여자와 양말 아무데나 벗어놓는 남자

서른 둘, 네모

by 이 길의 끝에서

“좋은 삶” “행복한 사람” “평범함”

이라는 말이 갖는 (글자적 의미가 아닌) 사회적 의미에는 반듯한 네모가 그려져 있다.


타지에 나와 10년을 살면서 이곳의 삶에 적응하기 위해 부지런히 이 사람들의 삶을 읽었다. 한국인만의 문화도 미국인만의 문화도 완전히 공감할 수 없는 어중간함에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선명해 지는 한가지가 있다.


각자 문화, 해 온 방식, 환경이 다른,

우리는 각각의 고유한 출발점과 도착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가라면 서러울 진지충으로써

나름대로 개인적 이유를 찾으며 10대와 20대를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또 그 중 많은 부분을 나를 잃어버린 채로 살았다 느낌을 받는다.


흔히 말하는 인싸가 되고싶어서 혹은 아싸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라떼는 교복에 받쳐입을 브랜드 운동화나 가방이 하나쯤 있어야 했고, 그게 또 유행에 맞아야 했고,

조금 더 커서는 해외 물 좀 먹어 봐야했고 그게 또 조금 티가 나줘야했고,

핫플가서 버벅대거나 촌스럽지 않게 조금 익숙할 만큼 그곳들을 다녀줘야 했다.


나와 내 주변은 모두 어느 정도 대학을 가고,

얼마만큼 이름있는 회사를 다니고, 직업을 갖고

음식도 알려진 브랜드의 음식을 먹어주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그런 아파트, 그런 차를 갖는..


모두가 같은 방향의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라 타 있다.


이것만 더 있어주면 내 삶은 반듯하고 깔끔한 네모야.

내 삶은 그 네모에 나를 집어 넣기 위한 삶이었다.


네모는 어디에든 존재했다.


학교에서 사랑받는 아이들의 특징,

사회에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특징.

선배든 선생님이든 어른들이든 우리 사회가 그려놓은 네모에 내가 넘쳐 보이거나, 튀어 보이면 늘 그건 제거의 대상 혹은 주의하여 고쳐야 할 것이었다.


전체와 비교해서 내 색깔이 짙으면 계속해서 꾸준히 색을 빼야했다. 개인적 호불호, 나만의 고유함을 외치기 시작하면 벌써 그건 네모에 맞지 않고 튀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어딜가도 학교에서 인기가 많은 친구들은,


적당한 밝음과 조금 넘치는 겸손함과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인간적임과 그러면서도 분위기도 깔끔하고 예의있고 외모도 준수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분명 각각의 고유한 존재인데

우리는 정말 모두 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었던걸까,

아니면 그 사회가 다루기 쉽도록 네모에 맞게 규격된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던 걸까?




그려진 네모의 삶 중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색깔의 상한선마저도

사회가 제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것이라도 공동이 공유하는 규격에 삐져나오거나 빗빗겨나오면 반드시 잘라 네모로 만들어야 했다.


나는 그런 완벽한 네모에 가까워지리라는

어처구니없고 당연히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내 색깔은 빼려고 노력하고 튀어나오면 누르며 지냈다.


내가 잘 하는 것과 잘 못하는 것을

건설적으로 분류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


무조건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짙은 것,

내게 부족한 것을 고쳐

나를 완벽한 네모 속에 넣어야겠다는 강박을 갖고 살았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못하는 것은 숨기거나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불완전한 존재로써 자연스레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되고,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내 불완전함을 매일 맞닥뜨린다.


내 논리와 내 방법 만으로 해결 가능했던 것들도 많았는데 점점 내 능력 밖의 일들,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진다.


나는 내게 주어진 모든 좋은 엄마의 역할을

잘 해낼만큼 능력이 많지도 않다. 한가지만 잘하기도 벅찬데 엄마로써 챙길 것이 한둘인가?


우리 아기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이든 있는 그대로의 나다울 권리를 가지도록 네모를 자꾸 지워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되 나의 부족함이나 남의 다름을 꼭 고쳐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움을 받아야 하면 기꺼이 받고 또 남는 것은 도움을 주면 된다.


며칠 전 어느 정신과 의사선생님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보았다.


“의술로 고칠 수 있는 병보다 없는 병이 훨씬 많다. 그리고 병은 누구에게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병을 완전히 도려내 우리 삶에서 분리시킬 순 없다. 병도 죽음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나의 부족함, 고칠 점들은 그리고 너의 부족함, 고칠 점들은 모두 우리가 함께 안고 가야 할 부분이지 뜯어 고쳐야 할 부분이 아닌 것 같다.


좋은ㅇㅇ 이라는 이름으로, 규격에 맞는 보통의 삶을 자녀에게 주고싶다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네모를 그려주는 일. 그러다 소중하고 고유한 색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런 일은

우리 아이들에게 하지 않을 거다.


서른 둘의 나는,

네모에 내 삶을 넣다가, 도대체 내가 뭘 선택해야 할지 모를만큼 텅 비어버린 부분을 메꾸며 살고 있고, 옅어진 내 색깔을 도로 채우며 지낸다.


나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남의 단점에도 너그러워지는 연습을 시작한다.


그래서 요리를 못하는 나는,

요리는 잘하지만 양말은 아무데나 벗어놓는 사람과

오순도순 살고있다.


반듯하지 못한 네모 둘이 꼭 끌어 안고

우리만의 컬러풀한 하루하루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