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산으로 가면 어떤가요? 그게 더 대단하지않나요?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회의실에서 결론이 나지 않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래서 사공이 많으면 안 돼.”
“결정은 한 사람이 해야지.”
“의견 수렴도 좋지만, 너무 많으면 산으로 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은 보통 이런 순간에 호출됩니다.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방향은 흐트러지고, 책임은 희미해지며, 조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경계의 말입니다. 회의가 길어질 때, 결론이 보이지 않을 때, 리더가 통제력을 회복하고 싶을 때 꺼내 드는, 일종의 ‘질서와 통일’을 강조하는 리더십의 언어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어느새 오십 대를 훌쩍 넘겨버린 인사부장으로 이 익숙한 속담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사공이 많아도 방향만 잘 잡히면, 배는 산도 넘을 수 있다.”
배가 정말 산으로 올라간다면, 그건 그 자체로도 오히려 더 대단한 일 아닐까요.
몇 년 전, 전사 평가제도를 개편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맡았을 때의 일입니다. 평소 같으면 우리 인사팀에서
주도하고 타 부서의 의견은 참고만 했겠지만, 이번엔 달랐습니다. 사장님은 각 부서장이 모두 참여하는
대규모 TF를 지시했고, 순식간에 사공 열 명짜리 배가 떴습니다.
첫 회의부터 난장판이었습니다. 영업은 실적 지표를, 연구소는 정성 지표를, 생산은 실행 가능성을 주장하며 서로를 몰아세웠습니다. 회의실을 나오며 다들 한 마디씩 중얼거렸습니다.
“어휴, 이거 진짜 배가 산으로 가겠네, 아주 그냥 날아가겠어”
“이건 정말 답이 없네.. 없어. 사공이 너무 많다니깐”
나 역시 속으로 ‘이건 답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의를 거듭할수록 묘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습니다. 서로의 날 선 의견들이 서로 자극이 되어, 그 충돌 속에서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업의 정량 지표와 연구소의 정성 지표가 결합되면서 범주별 가중치 시스템이 만들어졌고, 지원 부서가 강조한 협업 지표는 조직 간의 벽을 허무는 핵심 장치가 됐습니다. 여기에 생산 부서의 실행 가능성 검토가 더해지면서, 제도는 현장에 꼭 맞는 형태로 단단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기존에 없던 평가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도입 후 2년 동안 평가에 대한 불만은 눈에 띄게 줄었고, 승진과 성과보상에 대한 수용도는 이전보다 훨씬
높아졌습니다. 프로젝트 초반에는 분명 배가 산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결국 그 산을 넘어 새로운 길에 도착한 셈이었습니다.
이제 오십 대 인사부장에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은, 사람을 줄이기 위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사공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 조직에 진심인 사람이 많다는 건강한 신호입니다.
한 사람이 몰래 저지르는 ‘조용한 사고’보다, 여럿이 떠들다 우연히 발견하는 ‘황금 아이디어’가 조직을 살릴 때가 훨씬 많기 때문입니다.
배가 산으로 가는 진짜 이유는 사공이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노 젓는 방향을 한 곳으로 모으는 제대로 된 ‘키잡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리더의 역할은 사공의 수를 줄여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각자의 노를 맞잡고 힘을 합칠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공이 많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방향만 맞는다면 배는 사공이 많을수록 산으로도, 더 멀리도 갈 수 있습니다.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면, 그건 그 자체로도 꽤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