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5대 0의 여름, 아이들의 정원

벼룩시장: 이방인의 기억 가판대

by 목림


어느새 여름이다. 프랑스에서 월드컵이 시작했다. 축구를 좋아했던 기억은 없다. 노래는 좋아했었다. 사실이다. 아니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겠지. 드디어 독일의 음악대학교 시험의 시기는 왔고 나는 인류의 잔치 월드컵을 지척에서 보고 있다. 축구는 즐겁고 노래 시험은 괴롭다. 나보다 훨씬 먼저 유학을 온 작곡과 출신의, 친하지도 않은 형의 집에서 모두가 모여 축구를 보고 있다. 일주일 후에는 또 시험이 기다리는데. 우리나라는 IMF다.

월드컵과 유치원.jpg

각자 돌아가는 세상이다. 나는 큰 사람이 되기는 애초에 틀렸다. 도대체 거국적인 걱정이 없다. 게다가 아버지는 IMF에 전혀 관련이 없는 모양이다. 사업가는 아니니까.


월드컵 1등을 하려는 축구선수는 괴롭겠지. 듣고 싶은 노래는 즐겁겠고. 뮌헨에서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조금 수준이 떨어지고 친구는 그런 이유로 나와 함께 시험을 보러 다닌다. 그리고 바이마르라는 도시에 있는 학교 시험에서 친구는 합격한 모양이다. 나는 불합격했다. 물론 아직 시험을 치를 수 있는 도시는 남아있다. 축하를 해 주고 마음을 다시 다잡고 다음 학교에서는 꼭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왜 불쾌할까. 난 친구를 좋아하는데. 네덜란드에게 5대 0으로 져버린 축구를 보고 모두 낙심해서 작곡과 형 집 앞의 야외 선술집에 모여 맥주를 한잔하고 있다. 이곳은 정말 축구는 진심이다. 네덜란드의 승리에 나팔을 불어대고 환호를 하는 사람들과 차들이 거리를 시끄럽게 오간다. 유럽의 승리인가. 네덜란드의 승리인가. 한국의 패배일까. 일단 나는 패배했고. 남의 일처럼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데 한 무리의 축구 광란 패거리들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너희들 어디서 왔니?’


누군가 대답을 한다. ‘대한민국.’ 거친 폭소와 쾌락에 찌든 비웃음으로 그들은 독일어로 소리친다. ‘얼레꼴레리 5대 0 이래! 얼레꼴레리 5대 0 이래!’ 학교도 떨어졌는데 축구도 졌고 게다가 지금 유치원생만도 못한 유치함으로 무장한 서양인 무리에게 놀림까지 받는다. 불합격이 이런 고난을 부르다니. 나의 불행은 패를 지어 온다. 여기는 유치원을 ‘아이들 정원’이라고 한다.



이전 18화17화: 무임 연습실에서의 디크레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