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둔 왕좌와 동행의 길
이 글은 흩어져 있던 글을 브런치북의 흐름 안으로 다시 데려온 재수록 글입니다.
나는 영웅을 링에 올려놓던 사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영웅의 무대가 바뀌었다.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내 일상으로 들어왔다.
딸에게 물은 적이 있다.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이동하는 완벽한 존재가 있다면, 결혼하겠냐고.
아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영웅은 스크린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내 식탁 위에도, 내 어깨 위에도 슬그머니 올라앉아 있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영웅에게 기댈까.
누군가 내 삶에 마침표를 대신 찍어주길 바라기 때문은 아닐까.
영웅은 대개 구원처럼 등장하지만, 어느 순간, 그 구원은 심판의 얼굴을 닮아간다.
그 경계에서 나는 내가 앉혀둔 왕좌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다.
그 왕좌는 거창한 권좌가 아니라, 마음이 기대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는 자주 영웅이라는 이름을 빌려 채워지곤 했다.
지금은 서사적인 전쟁은 사라진 시대다. 가공할 화력으로 무장한 무기들이 버튼 하나로 승부를 끝내버린다.
주먹과 칼이 영웅의 얼굴을 남기던 시대는 저물었고, 총은 너무 빠르고 차가워서 한때 유행했던 미국의 서부 영화나 일부 홍콩 영화를 빼고는, 버텨내는 자의 서사로 남겨주지 않는다.
기술과 속도의 시대로 진입하며 영웅을 향한 열망은 스크린으로 옮겨갔다.
현실이 감당 못 하는 것들을 대신 해결해 줄 구원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영웅의 체급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그 거처는 스크린 안으로 옮겨졌고 그 빈자리를 슈퍼히어로들이 채웠다.
나 역시 그 거대한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단연 그 계보의 정점은 크립톤 행성에서 온 슈퍼맨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절망을 대신 처리해 주는 그의 전능함은 동경의 0순위였다.
그는 강한 남자가 아니라, 현실의 빈자리를 대신 메워주는 구원자처럼 느껴졌다.
그 뒤를 이어 배트맨이 등장했다.
슈퍼맨이 빛나는 하늘이라면, 배트맨은 짙은 어둠이었다. 초능력은 없지만 끝끝내 집요함으로 결론을 만들고, 판을 바꾸는 그의 힘은 또다른 매력이었다.
급기야 배트맨 vs 슈퍼맨이라는 대결 구도까지 펼쳐졌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누가 옳은지, 누가 더 강한지, 누가 이길지. 그 대결은 영화가 아니라 현대인들이 품은 오래된 기도와 닮아 있었다.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헐크 등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이름들.
내 기억 속에 각인된 그 화려한 얼굴들은, 제발 누가 이 지루한 싸움을 끝내달라는, 무엇이 옳은지 판정해달라는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 같았다.
과정보다 한줄의 답을 원했고 영웅이란 이름은 그렇게 종종 우리의 조급함을 대신 말해주는 입이 되었다.
1975년 TV에서 방영되었던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도 떠오른다.
부드러운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세계 최강의 무력. 빙글빙글 돌며 여전사로 변신하던 그 장면, 거짓말을 못 하게 하는 황금 진실의 올가미와 기관총도 막아내던 절대 팔찌, 그리고 마법 무기 같은 황금관. 당시의 내게 그녀는 강함보다 안전을 약속하는 신화였다.
세상이 흔들려도 저 여인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착각. 그 착각이 내겐 너무나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내가 품었던 구원이 얼마나 어설펐는지를 보여주는, 오래된 거울이었다.
오래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신개념 외계인이 등장했다. 도민준.
그는 400여 년 동안 늙지 않고, 공간 이동이 가능하고, 큰 부와 지혜를 갖추고 여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여지없이 나타나 구해낸다.
잘생기고 감성적이기까지 한, 더 이상은 완벽하게 만들 수 없는 존재.
저런 존재가 있다면 결혼하겠느냐고 딸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망설임 없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끝내 다음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아빠와 그 남자 중 누가 더 좋으냐"는 말.
답이 정해진 질문으로 굳이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최고인 줄 알았던 딸은 이제 컸고, 나는 선택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리될 수 없는 중년의 남자였고, 지극히 평범한 소시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정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작은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으로 산다는 것은 여전히 슈퍼맨의 전능함을 강요받는 일이다.
어쩌면 ‘신인류'의 등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 무게가 어깨를 짓누른다.
전문성, 인맥, 스펙, 체력, 자녀 교육과 노후 준비까지… 책임은 늘어나는데 마음은 야위어간다.
우리가 더 큰 영웅을 찾고 신격화 하는 이유는, 영웅 없이는 버티기 힘든 시대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완벽해진 영웅의 정점에서 나는 '타노스'를 보았다.
6개의 인피니티 스톤을 손에 쥐고 우주의 생사를 손가락 하나로 정리하려던 자.
그는 내게 지독한 심판자의 모습이었다.
너무 서늘해서 오래 남았다.
그 거대한 심판을 막기 위해 내가 흠모했던 영웅들이 총출동했다.
다시는 만들기 힘든 영웅들의 연합이었다.
각자의 신념과 서사, 상처를 끌어안고 모인 그들의 얼굴은 화려함보다 애처로움으로 남았다.
절망적이게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끌어모아도 타노스라는 단 한 존재의 압도감은 쉽게 꺾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공포는 힘 때문만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집행에서 왔다. 그는 옳고 그름의 자리를 토론이 아니라 단호한 집행으로 바꾸려 했다.
그 순간 인간은 구원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지워지는 '숫자'로 전락해 소멸된다.
내가 오래 품어온 영웅에 대한 갈망이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가로챈 심판자의 모습으로 도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난히 차갑게 다가왔다.
우리가 바라는 영웅이 결국 하나님급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그날 선명해졌다.
구원을 기다린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단칼에 문제를 해결해 줄 심판을 부르고 있었던 건 아닐까.
1부에서 불안의 손잡이로 삼았던 영웅들은 결국 내 안의 왕좌를 채우려 했던 우상의 투영이었고 또 결론을 빨리 얻고 싶어 했던 내 조급함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고백을 시작한다.
희망은 누군가 전능한 자가 나타나 문제를 단번에 정리해 주는 기적이 아니다.
희망은 오늘 하루, 내 안의 왕좌를 비워두는 일이다.
그 자리에 무엇을 앉히느냐가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배운다.
유년 시절 "도와주세요 뽀빠이!"라고 외치던 '올리브'의 비명은 어느덧 "도와주세요 슈퍼맨!"을 거쳐, 내 생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는 절박한 기도로 바뀌었다.
이름은 변했지만 내가 원한 것은 늘 하나였다.
흔들리는 내 삶을 붙잡아 줄 손.
바로 ‘구원’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숫자처럼 정리하지 않고 동행으로 남으신다.
타노스같이 손가락 하나로 인생을 삭제하지 않으신다.
예수는 하늘 위에서 군림하는 대신, 우리와 함께 진흙탕을 걷기로 하셨다.
내가 기다리던 것은 단호한 판결이 아니라 따스한 '손'이었다.
정리해 버리는 힘이 아니라, 끝나지 않는 지루한 하루를 함께 손잡고 견뎌내는 ‘사랑’.
나는 더 이상 하나님 급 영웅을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기적이 오지 않는 날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늘을 사는 쪽을 선택한다.
누가 대신 해결해 주는 삶이 아니라, 오롯이 오늘을 묵묵히 살아내는 삶.
슈퍼맨의 가슴에 새겨진 S는 희망을 뜻한다고도 했다. 나는 그 말이 슈퍼맨의 S보다 좋다.
우리는 그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을 견딜 힘을 빌려 살아간다.
다만 이제 내가 붙잡고 싶은 희망은, 거대한 힘의 판타지가 아니다.
비워둔 왕좌에서 시작되는 조용한 동행이다.
내 안의 왕좌를 비워두고, 그 자리를 ‘동행’이라는 이름의 ‘믿음’으로 채우는 삶.
이것이 내가 가진 작은 희망이며, 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