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주를 품는 일

엘리베이터의 코미디언 - 혜민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by Rain

근 들려온 1월 합계출산율이 1명에 근접했다는 소식은 가뭄 끝에 만난 단비처럼 반갑다. 작년 내내 0.6명에서 0.8명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던 소수점의 숫자들이 비로소 '1'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회복하려 한다는 것. 30대 인구의 유입과 혼인 건수의 증가가 원인이라지만, 내게 이 숫자는 단순한 통계 그 이상이다. 지금은 어두운 곳에 계신 누군가는 인구 절벽을 해결하면 노벨상 열 개를 받아 마땅하다고 했고, 나 또한 매월 발표되는 소수점 단위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그 수치를 내 삶의 성적표처럼 들여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수치 뒤에 숨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더 커지고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어제보다 조금 더 살만해진 기분이 든다.


엘리베이터 속 우리는 타인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개인주의자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우리가 집중하는 것은 오직 스마트폰 화면과 내가 내릴 층수뿐이다. 10초 남짓한 그 짧은 찰나에 대단한 정보를 얻으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인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동시에 나 또한 당신에게 무심하다는 일종의 세련된 방어 기제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깨고 '아기'라는 존재가 승차하는 순간, 우리의 방어막은 무력하게 무너진다. 광활한 우주 속 홀로 빛나는 별과 같은 아이 앞에서 차가운 기계 화면만 들여다보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안녕'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야 할까, 아이가 나를 무서워하진 않을까. 낯선 아저씨인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아이가 편안할지 온갖 계산으로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치는 찰나, 나는 기꺼이 자발적인 코미디언이 된다. 소리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만 다정하게 안녕을 외치고, 가뜩이나 작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어 올리며 손을 흔들 준비를 한다. 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삭막했던 엘리베이터는 온기로 가득 찬 소우주가 된다. 그 웃음 한 번에 우리의 하루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으로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세 명의 여자와 함께 사는, 이른바 '머리카락 덤불' 속에 모로 누운 남자가 된다. 예쁜 만큼 새초롬한 첫째 카카와, 조금 느려도 사랑이 넘치는 둘째 용용이. 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두 소우주다. 물론 이 우주에도 권태와 갈등은 존재한다. 여느 때처럼 와락 안기던 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미묘하게 몸을 비틀어 안길 때, '아빠' 이전에 '남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퍼지기도 한다. 퇴근길을 수놓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은 이제 닫힌 방문 너머 친구들과의 속삭임으로 옮겨갔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내 월급의 상당 부분이 아이의 일상으로 증발하고, 내 지갑은 늘 궁핍한 처지에 놓이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꺼이 내어주는 진짜 소중한 것들은 따로 있다. 온전한 나의 시간, 가슴 깊이 품어두었던 꿈의 유예, 그리고 나의 내일을 아이라는 존재의 삶에 온전히 포개어 두는 일. 때로는 내가 사라지고 '누구의 부모'라는 이름만 남는 것 같은 아득한 상실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애틋한 헌신을 감싸 안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인 '생의 충만함'이 있다. 나는 그것을 '생의 지평이 넓어지는 감각'이라 부르고 싶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아지기 위해 우리 자신의 4분의 3을 버린다"고 말했지만, 부모가 되는 과정은 오히려 나조차 몰랐던 내 안의 거대한 4분의 1을 새롭게 발견하는 여정이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 때는 결코 닿을 수 없던 인내의 끝을 확인하고, 타인의 작은 숨소리에 이토록 절실하게 반응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이의 작은 손등에 피어난 솜털 하나에도 경이로움을 느끼는 그 감각은, 무미건조하게 굳어있던 나의 영혼을 다시금 말랑하게 무두질한다.


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방문을 닫고, 예전만큼의 살가운 애정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쏟은 진심이 헛된 것은 아니다. 부모가 되어 얻는 진정한 선물은 아이에게서 되돌려 받는 보상이 아니라,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 본 '나 자신의 연대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나의 미래가 아이에게 묶여 있는 듯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아이를 통해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이어질 눈부신 온기를 미리 경험한다.


성경 속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구절을 비로소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고, 부모의 마음은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는 가장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낭비에 가까워진다. 그 마음이 지독하면 할수록 우리의 내면은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운 숲이 된다.


그러니 당신의 시간과 온 열정, 그리고 빛나는 미래를 기꺼이 이 작은 소우주에 던져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모해 보일지언정, 단 한 번뿐인 가장 찬란한 생의 축복이다. 세상 무해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공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그 집 안에서 당신은 비로소 깨닫게 될 것이다.


내가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의 세상을 비로소 완성해 주었음을 말이다. 완생(完生)이다.

수, 토 연재
이전 12화편식하는 어른들을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