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고민 - 임경선 [태도에 관하여]
나이가 들고 일상이 분주하다는 핑계로,
혹은 부담 없는 편리함을 쫓아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 DM 같은 가벼운 소통에 익숙해지다 보니,
피상적인 관계에서 오는 단조로움 속에서
타인과 등을 돌리는 일이 무척이나 수월해졌다.
소위 '라떼'라 불리던 시절만 하더라도,
관계의 단절은 물리적 충돌이나 감정적 격분 같은
분명한 동기와 "너와 절교하겠다"는 의사표현을
또렷이 전달한 뒤에야 관계는 비로소 단절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차단이나 언팔로우라는 소리 없는
행위만으로도 충분하다. 감정을 크게 소모하지
않고도 관계를 맺고 끊는 것이 손가락 몇 번의
휘두름으로 가능해진, 이른바 '손절'이 익숙한
세대가 된 것이다.
때로는 맞팔과 언팔, 친구 추가와 차단 사이를 오가는
이 한없이 가벼운 행위들이 단순한 단절보다는,
오히려 지금 내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최근 나는 불편했던 금전 문제와 무리한 부탁들에
지쳐, 결국 한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십수 년을 알고 지내며 쌓아온 두터운 추억과
깊이 의지했던 감정들이 발목을 잡았기에
고민은 깊고도 무거웠다.
하지만 거절의 불편함을 감내하는 일도,
도와주지 못하는 미안함을 조롱으로 되돌려 받는
속상함도 더 이상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옛날 사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모양인지, 단칼에 관계를 베어내지는 못했다.
대신 명절을 빌미 삼아 건강에 좋은 선물을 들고
그 친구의 부모님을 찾아뵈었다.
꼭 건강하시라는 당부와 다음에 또 찾아뵙겠다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정중한 거짓말을 끝으로
나는 한때 소중했던 인간관계를 매듭지었다.
본래 에세이란 작가의 사적인 일기 같거나 혹은
고루한 '꼰대'의 조언 같아 그리 선호하지 않았으나,
친구를 잃은 상실감 속에서 우연히 마주한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는
뜻밖의 위로가 되었다. 이 책은 어떤 태도로
지혜롭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2030 청년들이나,
이제 막 글쓰기의 첫걸음을 뗀 작가 지망생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하다.
작가는 소설과 에세이를 쓰며 10년 넘게
인생 상담을 해오던 중, 결국 자신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살아가는 태도’였음을 깨닫는다.
더 나아지려 애쓰는 삶 속에서
"태도는 자발적으로, 사랑은 관대하게, 일은 성실하게, 관계는 정직하게, 사안은 공정하게"
대하려 노력해 온 시간들이
결국 자신을 자신답게 만들었다고 말이다.
특히 인간관계에 대한 대목에서
나의 마음은 한동안 머물렀다.
"서로의 노고를 고마워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걸로 경시하지 않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많은 것들은 사랑으로 함께 해나갈 수 있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깨달았다.
인간관계에서도 나는 늘 준 만큼은 돌려받고
싶어 했다. 장사하듯 손해 보지 않으려 애썼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계산했다.
최근의 일을 떠올리며 며칠을 마음 쓰던
나를 돌아보았다.
혹시 나는 그 사람을 잃는 것보다,
내가 소중히 여긴 기억과 추억을 잃는 일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나에게 책은 다시 한번 다정한 문장으로
위로를 건넨다.
불편한 인간관계를 견뎌내야 할 이유는 없다.
"당장은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만
한번 관계를 자연스럽게 놓아 버린 다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피차 홀가분해할지도 모른다.
둘 사이에 일부러 거론하지 않는 갈등이 있다면
그 갈등을 잠시 가만히 둬보기로 한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자연스레 이해되고
용서되는 것들이 있다.
갈 사람은 가고 돌아올 사람은 분명히
다시 돌아온다. 관계의 상실을 인정할
용기가 있다면 어느덧 관계는 재생되어
있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의 자연스러운 생로병사를
나는 긍정한다."
그렇다.
굳이 날을 세워 무언가를 정의하고 결정지을
필요는 없었다. '절교'나 '차단' 같은 명시적인
행위로 마침표를 찍기보다, 그저 그 흐름을
'그대로 두기로' 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의 구절처럼,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이것이 인연의 본모습 아니겠는가.
오늘도 나는 좋은 책으로 위로를 얻고,
정갈한 문장들로 마음의 허기를 채웠다.
당신에게도 이 책이, 그리고 나의 이 서툰 기록이
따스한 봄날의 햇살 한 자락처럼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