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끈기'

성실함의 재발견 - 크리스토퍼 몰리 [새로운 인생을 팝니다]

by Rain

“너는 마음만 먹으면 잘할 텐데, 끈기가 없어.”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자주 듣던 말 중 하나였다. 시험 기간이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스스로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으니, 그 말은 틀린 게 없었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 의식처럼 치러지는 책상 정리, 정갈하게 줄 맞춘 필기도구, 포스트잇에 적힌 야심 찬 계획들. "아차, 간식을 안 챙겼다." 거실로 나가는 순간 엄마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이것 봐, 책상에 한 시간을 못 앉아있지!” 억울한 마음에 공부할 의욕은 씻은 듯 사라지고, 내 마음을 몰라주는 서러움에 눈물만 허벅지로 툭툭 떨어뜨리던 날들이 반복되곤 했다.


중학생 때부터 독서실 정기권을 끊고 다녔지만, 미동도 없이 공부에 몰입하는 친구들을 보면 경외감마저 들었다. 연습장에 온갖 잡생각을 끄적이다가도 친구들의 부름 한 번에 “그래, 머리 좀 식히고 오자”며 오락실이나 PC방으로 향했다. 충분히(?) 머리를 식히고 돌아와서는, 이미 늦었으니 내일부터 정말 열심히 하자며 하루 짧아진 시험 준비 계획표를 수정하고 퇴실하는 것이 나의 학창 시절 모습이었다.


한 번은 친구 부모님이 간식을 들고 독서실에 찾아오신 적이 있었다. 하필 그날도 우리는 오락실에서 머리를 식히고 있었다. 사명감 투철했던 독서실 사장님은 우리가 전등을 켜고 끈 시간을 분 단위로 프린트해서 부모님께 보여주셨다. 켜지자마자 무섭게 꺼지기를 반복하며 구멍 난 시간의 기록들. 부모님은 저 캄캄한 밤하늘이 우리의 미래 같다고 개탄하셨고, 우리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애먼 운동화 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의 친구는 지금 건설 대기업에서 베트남 발전소 건설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친구들 사이에서 ‘베트남 왕자’로 불린다. 나 또한 누구나 알 만한 곳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일하며 가정을 꾸리고 사니, 사회 구성원으로서 1인분은 족히 해내고 있다고 자부한다. 가끔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가 그때 끈기만 있었어도…” 하고 말끝을 흐리지만, 그게 후회인지 안도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저 좋은 시절에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게 참 자랑이다!"라고 부모님은 지금도 말 끝을 살짝 올리시지만 우리 스스로는 지금의 모습이 꽤나 자랑스럽다(사실 1인분도 못 할 줄 알았다..)


부끄럽게도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나는 ‘성실하고 끈기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물론 유능하지는 못하다는 완곡한 표현일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몇 시간이고 한자리에 앉아 집중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과 게임기 그리고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거실에서 나를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고 어지러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써 내려가는 나를 보면, 그 시절의 부족한 집중력이 오롯이 내 너저분한 책상 탓만은 아니었다는 생각도 든다.


김주환 교수는 저서 《그릿(GRIT)》에서 이를 공부는 물론 무엇이든 잘 해내는 ‘마음 근력’이라 정의했다. 내가 나 자신을 조절하는 능력을 뜻하는 자기 조절력,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알아차리고 공감할 수 있는 대인 관계력, 그리고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자기 동기력이라는 세 가지 기둥이 마음을 지탱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어린 날의 나는 엉덩이가 가벼웠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공부법을 몰랐고 그 일이 내게 줄 유익에 대한 동기가 약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된 ADHD의 유전적 요인을 핑계 삼지 않더라도 어둡고 조용한 독서실보다는 밝고 넓은 내 방이 더 집중이 잘 되었고, 억지로 시간을 채우기보다 친구들과 문제를 내고 맞히며 설명할 때 더 신이 났던 나였다. 적절한 보상과 아빠와의 영어 단어 대결 같은 다정한 관심이 있었다면 내 투지는 조금 더 일찍 불타올랐을지도 모르겠다.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던 나는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공부에 대한 뒤늦은 갈망을 느꼈다. “일을 그만두는 건 안 되지만,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면 뭐든 공부해도 좋아.” 아내의 이 말은 서운함보다 안도감을 주었다. 신혼 초, 내가 공부를 위해 일을 쉬어도 2년간은 본인이 가정을 책임지겠다던 아빠같은 아내였다. 매일 별을 보면서 출근하고 달을 보면서 퇴근하는 불쌍한 가장을 위해 자기가 더 벌어오겠다더니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임용고시에 합격해 멋지게 교사가 되었다. 그 든든하고 따뜻한 지지 덕분에 나는 노무사 1차, 소방학 복수 학위 취득, 산업안전기사 자격증, 영어회화까지 쉬지 않고 배움의 길을 걷고 있다.


공부를 해보니 ‘공부도 재능’이라는 말에 깊이 동감하게 된다. 책을 통째로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천재 친구의 고백을 들을 때면 불공평한 세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의대 입시나 천재들과의 경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단한 재능이 없어도 끈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그런 공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알고 보니 나도 그 정도의 끈기는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고 뿌듯할 뿐이다.


크리스토퍼 몰리는 《새로운 인생을 팝니다》에서 인생의 세 가지 핵심을 이렇게 짚었다.


“좋은 인생을 위한 세 가지가 있다. 배우는 것, 버는 것, 그리고 열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한 배워야 하고, 자신과 누군가를 위해 빵을 벌어야 하며, 무엇보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 끊임없이 열망해야 한다. 배움은 우리 영혼이 낡지 않게 매일 새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이며, 버는 것은 그 영혼이 깃든 육신을 이 땅에 단단히 발붙이게 하는 숭고한 노동이다. 그러나 이 둘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열망이다. 배움이 지루한 숙제가 되지 않게, 노동이 영혼 없는 반복이 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내 안의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한 뜨거운 갈증이기 때문이다. ​뒤늦게 타오른 나의 공부 또한 단순히 지식을 채우거나 자격증을 늘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차라리 내 삶의 변곡점에서 마주한,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열망에 가깝다.


우리는 지금 각자의 인생에서 중요한 시대의 출발점에 서 있다. 나 역시 내 인생 최초의 광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시작해 보려는 출발점에 서 있다.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지금 '영원한 구원'을 들고 그 길을 떠나려 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글에 마음이 닿은 당신의 인생 또한 매 순간 반짝반짝 빛나기를 바란다.


당신의 그 '끈기' 있는 건투를 진심으로 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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