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대하는 정직함 - 요조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100권의 책을 읽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목표를 세운 뒤, 본격적인 독서의 항해를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책에서 찾던 중, 임경선 작가의 《태도에 관하여》를 읽다가 가수 요조가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그녀의 산문집을 구해 펼쳤다.
하루 만에 다 읽힐 정도로 문장은 매끄럽고 가벼웠으나,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식사를 마쳐갈 때쯤 무심하게 툭 던져준 휴지 한 장처럼, 혹은 아이가 모서리에 부딪히지 않게 손을 내미는 다정한 배려처럼, 책 곳곳에는 타인을 향한 사려 깊은 온기가 가득했다. '늘 무사하세요'라는 작가의 인사 속에는 단순히 흐르는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아니라, 삶의 파도를 굳건히 견뎌내 온 '살아내온 나날들'의 흔적이 역력했다. 지면에 실린 일상보다 차마 싣지 못한 슬픔의 무게가 훨씬 더 깊고 무거웠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에게 가수 요조는 군 생활의 고단함을 지탱해 준 오른쪽 날개였다. 왼쪽 날개는 자정부터 새벽 두 시까지 감미로운 목소리로 나를 다독여준 정지영 아나운서의 <스위트 뮤직박스>였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다정한 선배 누나의 응원이었다면, <요조의 사랑의 롤러코스터>는 연하 후배의 달콤한 속삭임 같았다. 그러니 힘들었던 시절을 함께 통과한 '군대 동기' 요조의 책을 어찌 지나칠 수 있었겠는가.
본래 산문이나 에세이는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 같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적 친밀감이 두터운 박정민 배우의 《쓸 만한 인간》이나 최강록 셰프의 《요리를 한다는 것》을 읽으며, 아는 이의 속마음을 몰래 들여다보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조의 글 또한 글쓰기에 고뇌하는 작가지망생, 달리는 즐거움에 매료된 러너,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건네어 우리의 마음을 보듬는다.
제주에 터를 잡고 '책방무사'를 운영하며 술과 채식과 달리기를 사랑하는 그녀의 삶은, 평생 제주의 바람을 담았던 김영갑 사진작가와도 닮아 있었다. 나 역시 그의 사진에 매료되어 제주를 사랑하게 되었기에 그녀의 고백이 무척 반가웠다.
2003년의 겨울은 유독 시리고도 뜨거웠다. 군 복무 중 얻은 찰나의 휴가, 재회한 전여친은 절망뿐인 내 군 생활에 내리쬐는 한 줄기 빛이었으나, 그녀에게 나는 그저 미안함 섞인 풋사랑의 잔상일 뿐이었다. 맥주 한 잔에 섞인 우리의 온도는 그토록 불균형하게 뜨겁고도 차가웠다. 작별을 고하려 나선 길 위로 무심한 폭설이 쏟아졌다. 끊긴 지하철과 멈춰 선 차들 사이에서 선택지는 없었다. 결국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그녀를 데려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는 그녀를 따라 도착한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 "넌 여전히 아무 계획도 없이 지내는구나." 비수처럼 날아든 그녀의 질문에 나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끌어모아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이 전시회 보러 온 거야. 잘 가."
쫓기듯 도망쳐 들어간 전시장. 그곳에는 김영갑 작가가 포착한 제주의 바람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허풍으로 내뱉은 발걸음이었으나, 사진 속 제주의 풍광에 넋을 잃은 채 몇 시간을 서성였다. 그 길로 제대하자마자 제주로 떠났던 가슴 시린 기억이 요조의 문장 위로 겹쳐 흘렀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것이 참 재미있다.'라고 생각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요조는 먼저 하늘로 떠난 동생의 이야기를 어렵고도 쉽게 풀어낸다. 상실을 딛고 성장해야 한다는 세상의 압박을 뒤로한 채, 동생 생각에 슬프면 울고 재미있으면 웃으며 그저 느끼는 대로 살겠다는 그녀의 고백에 나 또한 마음 한구석이 아릿했다. 지하철 사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기 위해 용기를 내는 모습엔 진심 어린 응원을 보냈고, 부모님과 다정히 이름을 부르며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까닭 모를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창밖으로 부드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이 밤, 타인의 삶이 담긴 에세이를 읽는 것은 내 안의 얼어붙은 감각을 깨우는 일과도 같다. 가벼운 책장 너머로 전해지는 무거운 진심들이 봄꽃처럼 마음속에 피어난다. 굳이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이 봄밤, 누군가의 진솔한 고백을 길잡이 삼아 내 마음의 지도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겁고 충만한 시간이다. 오늘 밤도, 우리 모두 부디 무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