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레거시 코드(The Legacy)

서른 전에 죽고 싶었던 개발자의 리팩토링 기록

by 누워 사는 개발자

레거시 코드란 이전 개발자나 팀이 남긴, 현재는 구식 기술로 작성되어 유지보수가 어렵지만 여전히 핵심 비즈니스에 사용되는 오래된 소스 코드를 뜻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에서도 이런 레거시 코드를 건드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오래된 코드일수록 거쳐 간 손길이 많고 히스토리는 복잡하게 얽혀 있어, 조금만 잘못 다뤘다가는 치명적인 버그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 마음속에 남겨진 레거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미 닳고 닳은 나의 레거시를 꺼내어 놓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주말이라 다들 밖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브런치를 많이 보지 않을 거라는 마음으로, 빠르고 조용히 글을 올린 뒤 소중한 고양이들과 나만의 시간을 보내야겠다.




존재를 부정당한 시스템의 결함


나와 엄마의 관계는 어디부터 얘기를 하면 좋을까. 많이들 보셨을 것 같은 영화 에에올,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2022)>의 모녀의 관계에서 시작해 볼까. 에에올을 볼 때의 나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에에올을 봤을 때 안 울었던 이유는 어쩌면 내 인생을 더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에에올의 엄마는 적어도 처음에도 딸의 정체성을 인정을 해 주지 않던가. 남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뿐. 우리 엄마는 다르다. 우리 엄마는 나와 가치관이 충돌하면, 나에게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내 방문을 차며 문을 열라고 했다.


가정폭력은 아빠로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집에 남아나는 가전/가구가 없었고, 문은 부서져 있었으며, "너희(오빠와 나)만 없었으면 이혼을 했을 거다"라는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자랐다.

폭력은 전염이 된다고 하던가. 비단 아버지만 폭력을 휘두른 것이 아니었다. 방문을 닫고 들어간 나에게 문을 열라며 문을 발로 차며 소리를 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오빠에게 방구석에 몰아넣어져서 발로 밟히던 어린 시절의 나 자신 또한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이다. 이 집에서 막내로 자라면서 나는 많은 폭력을 감내했던 것 같다.


나만 없으면 이혼했을 거라는 말과 동시에, 오빠가 외로울까 봐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란 나는, 나의 존재를 어머니에게 부정당했다고 생각했다.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환경에서 내린 결론은 늘 하나였다. '내가 사라져도 괜찮겠다.' 하지만 죽을 용기가 없어 역설적으로 더 열심히 살았다.

죽을 용기가 없으니 더 열심히 살려는 것은 부모님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나를 인정하고 싶은 욕구도 있다. 여기에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함께 작용했다. 완벽주의인 나의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추려면 더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완벽주의 성향이 먼저 생긴 것인지, 내가 나를 인정하지 못해서 완벽주의 성향이 생긴 건 지는 불분명하다.


20대 초반의 나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와 강박장애 등등등을 치료하기 위해 매일 삼시 세 끼를 먹듯 하루 세 번 약을 한 움큼씩 먹고 ‘버텼다’. 하루하루를 잘 살아나가는 게 내 목표였다. 나에게 30대, 40대는 없었고, 그냥 하루하루를 죽지 않고 살아나가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항상 30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 죽을 용기가 생겨서 스스로 죽든, 공황으로 죽든, 사고가 나서 죽든 어쨌든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을 다닐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내가 매일매일 약으로 버티고 있는데 이 삶이 의미가 있는가였다. 약으로 유지하는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2년 반의 상담과 약물치료 끝에 약을 서서히 줄일 수 있었고 병원 없이 몇 년을 살았다.




몸에 새긴 생존의 기록


20대 초반, 한 움큼의 약으로 삶을 유지하던 시절을 지나 어느덧 20대 후반이 되었다. 계획에 없던 안정적인 삶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내 몸에 삶의 의미를 새기기로 했다. 새기고 싶은 것은 명확했다.


하나는 스스로 빛을 내는 달의 형상.

나는 자신이 항상 달 같다고 생각했다. 내 안의 음기, 그리고 무언가에 의해 비추어져서 빛나는 달. 그런 달의 속성과 나와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과 나는 또 다르다. 나는 마음먹기에 따라 해나 별처럼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 그렇기에 달이지만 해나 별처럼 발광하는 느낌의 타투가 하고 싶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해, 별, 달이 모두 있는 도안의 상징은 이 우주의 조화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클로버를 든 토끼를 새겼다.

힘들었을 때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잡아먹히는 초식동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도안에서는 초식동물인 토끼가 행복과 평화의 상징인 클로버를 들고 있다. 나 자신에게 스스로 행복과 평화를 주는 것이다.

내 타투에서 토끼가 주는 클로버는 초록색이 아니라 파란색이다. 파란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다. 푸른 바다의 색. 남들과 다른 파란색의 클로버지만, 나는 이게 좋다. 그리고 이게 나의 행복이다.


타투는 내가 나에게 주는 첫 번째 긍정이자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 시도는 또다시 거센 충돌을 일으켰다. 어머니는 모진 말로 나를 부정했고, 지독한 고독감이 밀려왔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지켜준 것은 ‘타투 회복기라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작은 제약이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배가 고프고 머리가 아픈 생리적인 반응들을 느끼며 깨달았다. 어쨌든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엄마에게 예상치 못한 사과를 받다


엉킨 실타래 같던 엄마와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 건 2024년의 홋카이도 여행이 계기가 되었다.


24년도에 휴가로 긴 여행을 가게 되었다. 원래는 짧은 여행이었는데 일정이 꼬여서 긴 여행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여행해야지, 혼자 하는 여행도 익숙하니까,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함께하겠다는 것이다. 돈도 엄마가 더 많이 지불하겠다고 한다. 나는 처음엔 거절했다. 예전에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엄마를 모신 적이 있다. 그때 너무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건 어떻느니, 저건 어떻느니... 그리고 우리 엄마는 너무 보수적이고 조심성이 많았다. 그리고 다른 여행들도, 함께 하면 엄마는 가만히 있고 내가 무조건 일정을 다 짜야하기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 그래서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엄마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일정을 짜라고, 엄마는 무조건 OK라고 했다. 원한다면 숙소에만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엄마가 돈도 더 지불한다는 얘기를 하니 밑지는 장사 같지는 않았다.


여행은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엄마는, "그럴 수 있지"라고 하는 것이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엄마의 태도에 놀랐다. 내가 일정을 짜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냥 마음을 놓으라고도 했다. 여행 중에 온천에 갈 일이 있었는데, 타투 금지인 온천을 보고는 "시골이라서 타투를 금지하는 것 같다"라며 내 편을 들어주기도 했다. 내가 살이 찔까 봐 걱정하고 있을 때 "살쪄도 괜찮아"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처음엔 엄마에게 날이 서 있었지만, 엄마의 이런 태도에 나는 점점 마음이 열렸다.


그리고 여행 마지막 날, 내가 일정 짜는 거에 왜 이리 스트레스를 받느냐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나는 예전에 유럽 여행을 갔을 때나 평소에 엄마가 소리를 지르고 따지는 게 트라우마가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엄마는 그것들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그때는 엄마도 사느라 힘들어서 그랬다고... 엄마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날이 서 있어서 그랬다고.


그리고 엄마는 먼저 한국에 돌아갔다. 나는 엄마가 없는 빈 숙소를 보며, 엄마의 사과를 생각하며,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서 엄마가 준 도움들. 그리고 이 지구상에 내 편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 그게 바로 엄마라는 사실. 그리고 엄마에게 인정을 받기를 포기했던 내가 엄마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 자연의 섭리 상 엄마가 노화로 먼저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사실들이 복합적으로 다가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감정이 너무 벅차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가 죽는다는 것은 이제 나의 선택지는 아니므로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나는 엄마와의 관계는 엉킨 실타래라고 생각을 해서 그냥 끊어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사과를 받다니, 풀어낼 수 있는 실타래일 수도 있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또 좋은 일도 있다고, 이런 날도 오는구나. 심하게 우울증을 앓았던 20대 초반에도, 그리고 다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지금도. 계속 살아줘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리팩토링은 계속된다


여전히 내 마음의 레거시는 복잡하고 유지보수가 어렵다. 때로는 깊은 무기력함에 빠져 모든 프로세스를 중단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내가, 그리고 지금의 내가 포기하지 않고 'Run' 버튼을 눌러온 덕분에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지나온 아픈 역사들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나는 이제 그 코드를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회사 병가 45일에 대학병원에 입원까지 했지만, 다시 회복하고 있다. 엄마가 운전해 주는 차로 외래 진료를 다니고, 매일 글을 쓴다.


어제보다 조금 더 나를 이해하게 된 오늘이 있다면 이 마음의 레거시도 언젠가는 매끄럽게 돌아갈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