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초보주부의 첫 김장
만약에 김치가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있을 거라 어렸을 적 생각했다. 아마 인생을 몇 년 살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했겠지. 사람은 이렇게 거만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김치의 소중함을 알지 못해서 그랬으리라..
한국인은 김치를 '그리워'한다. 김치의 맛을 그리워한다기보다, 어렸을 적부터 항상 식탁에 빠지지 않았던 존재의 부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젓가락질이 향할 곳을 잃었을 때 주저 없이 향할 수 있는 반찬. 식사의 빈틈을 탄탄하게 채워주던 그 존재가 그리운 것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 도착한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김치가 그리웠다. 김치 없는 식탁에서 허전함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프랑스 사람들이 주로 곁들여 먹는다던 새콤달콤한 당근라페는 김치와 비교조차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김치가 먹고 싶을 것이라 예상해서 야심 차게 한국에서 가져온 볶음김치를 꺼냈다. 그러나 즉각 취식형 전투식량에 있는 김치를 먹는 것과 같은 흐물텅한 짭짤한 볶음김치는 상큼하고 아삭한 김치의 존재를 대체할 수 없었다.
김치 수혈이 시급했다.
사실 프랑스에 살면 김치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사 먹거나 만들어 먹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미쳐가는 환율과 파리의 물가를 감당하기 위해 숨 들이쉬고 허리띠 힘껏 졸라 맨 초보주부의 선택의 폭은 하나였다. 김장하기..
한국에서 김장은 할머니댁 가서 무거운 거 나르고 고기 왕창 먹는 날이었다. 젓갈의 비율, 고춧가루의 양, 속에 들어가는 재료들은 전부 할머니의 오랜 세월에서 비롯된 레시피였다. 고기만 먹지 말고 그 귀한 레시피 좀 미리 배워 놓을걸 후회가 되었다.
살면서 김장이라는 것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전해 보기로 했다.
할머니도 처음은 어려우셨겠지.
처음부터 배추김치는 난이도가 높으니까 조금 진입장벽이 낮은 섞박지를 만들어봤다. 재료는 어느 정도 준비하려고 노력했다. 길이가 내 팔만한 기다란 무, 요리에도 쓰지만 사실은 김장용이었던 고춧가루, 집에 늘 있는 양파, 한국보다 5배는 지독한 마늘, 왜인지 모르겠지만 집에 있던 피시소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장의 무기 사이다. 비록 새우젓, 천일염, 액젓, 뉴슈가 등의 재료가 없었지만 김장을 시작했다.
만들고 맛을 봤다. 이상하게 생겨서 맛도 이상한 무 때문인지, 주재료가 없어서였는지 원인은 모르겠지만 너무 맛이 없었다. 아리고 짜고 달고 혼자 낼 수 있는 맛은 온몸으로 내고 있는 섞박지가 탄생했다. 아직 숙성되지 않아서 그러리라 믿었다. 보통 3일을 밖에서 숙성해야 한다고 해서 기다렸다.
미지근하고 아리고 짜고 단 섞박지가 되었다.
맛없지만 버리기 아까우니 꾸준히 먹어가며 처리해 나갔다. 그렇게 나의 첫 김장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손이 안 가서 먹지 않다가 오랜만에 먹어볼까 싶어서 꺼냈다. 냄새가 달라진 것 같아서 얼른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에서 먹던 그 반가운 김치 냄새가 났다! 발효가 이제야 된 것이었다!
왜 이제야 된 거야. 울컥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나의 첫 섞박지는 마지막에 빛을 발하고 동났다. 어떻게 그렇게 맛있게 변했는지 원인은 모르겠다. 다음번에도 얼렁뚱땅 비슷한 재료 다 때려 넣고 기다리면 맛있게 변할까?라는 꼼수만 생겼다. 이 꼼수들이 모여 주부의 노하우가 되는 거겠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에서 다음번엔 어떻게 해볼까?라는 자신감으로 바뀐 나의 첫 김장.
내 손으로 김장을 해보다니 나 진짜 주부가 된 것 같다.
초보주부는 오늘도 한 걸음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