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더 좋은 주인이 되고 싶게 해 - 06
나는 명실공히 MBTI P인 사람이다. 직장 동료는 나와 성격 유형이 같은 자신의 연인에 대해 울분을 토하며, 어떻게 예약이란 걸 모르고 살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의 표정이 정말 슬퍼 보여서 나는 그러게 말이에요, 라고 답했지만 사실 그 연인의 마음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무계획이야말로 인식형(P)이라는 인간들의 본질이니까.
생각하지 않은 장소를 마주치는 것이 좋다. 별점 5점이 검증된 맛집을 미리 찾아서 가는 것보다 우연히 마주친 식당에 들어갔다가 별로 맛이 없어서 푸하하 웃는 게 더 즐거운 하루다. 길을 잃는 건 실수가 아닌 신나는 탐험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서울에서, 그것도 강아지와 같이 지내려면 준비라는 것이 필수인 법이다. 강아지와 갈 수 있는 곳도 희박한 마당에 가는 데까지 실랑이를 하며 소진되는 에너지를 고려하면, 목적지를 반드시 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그런 삶에 익숙해져서 재미의 본질을 잊어버렸었나 보다. 얼마 전 처음 만나는 견주분과 반려견 놀이터에서 뵙기로 했었는데, 약속 한 시간 전쯤 받은 메시지가 기묘했다.
오늘은 거기 안 가고 ○○산 간다고 해서 못 갈 것 같아요.
누가 안 간다고 했다는 말인가? 견주 분과 개만 산책을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일지, 의문스러웠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갈지도 모르겠어요. 반려견 놀이터 쪽으로 가네요.
잠시 뒤 다시 메시지가 왔다. 이번엔 또 누가 간다는 말인가? 행간에 숨겨진 산책의 주체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채 헐레벌떡 산책 준비를 하고 하쿠와 놀이터로 향했다.
강아지를 만난 뒤 의문은 풀렸다. 같이 걷던 어린아이가 고집을 부린 것도 아니고, 유체이탈 화법을 쓰신 것도 아니고, 강아지가 가자는 곳으로 매일 자유롭게 산책을 해 주신다는 거였다.
산책 습관을 잡는 데 급급해 오랜 시간 훈련처럼 산책을 시켜온 나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강아지가 어디로 갈 줄 알고 줄을 이끌 자유를 부여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강아지의 표정은 꽤나 행복해 보였다. 생각보다 멀리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깜깜하다는 주인의 속내는 모른 채, 씩씩하게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더운 날씨에 혀를 내밀고 잔뜩 헥헥댔지만 녀석은 웃고 있었다.
오늘도 하쿠와 산책을 나갔다. 나름대로 익숙해진 새 동네에서 강아지는 자연스럽게 제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홱 앞질렀다가 안 된다는 신호로 목줄을 살짝 당기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내가 사랑하는 갈색의 맑은 눈이 투명하다.
내일은 하쿠가 가자는 데로 가 볼까? 하쿠를 기르면서는 그리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다. 오늘은 갈 곳이 있지만 대신에 처음 가는 골목을 거쳐 가본다. 강아지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두리번거리느라 바쁘다. 너도 P니?
P에게는 P의 길이 있다. 느리고 틀려도 여정 자체에서 행복을 느끼는 길. 쉬를 원만히 싸게 하기, 다른 강아지와 이슈 없이 길을 지나기, 의젓하게 횡단보도 건너기 같은 것은 어쩌면 개가 아닌 견주로서 내가 가진 목표다.
강아지는 내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른다. 인간 사회의 규칙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가를 따르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길 그 자체일 것이다. 다시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되새겨본다. 멀리 가지 못해도 우리가 기쁘면 그만이다.
그래, 내일은 P의 여정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