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홉, 일상의 비극과 희극

위대한 문학의 나라, 러시아

by 이헌철
image.png 체홉 Ⓒwikipedia

당신의 오늘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아침에 지하철을 놓쳐 지각했고, 점심엔 동료와 사소한 말다툼을 했으며, 저녁엔 퇴근길 편의점에서 할인 도시락을 집어 들었다면 말이다. 가까이서 보면 한숨만 나오는 하루지만,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어딘가 웃음이 나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19세기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은 바로 이런 일상을 무대에 올렸다. 영웅도 악당도 없고, 극적인 사건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무대 위 인물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고,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었다. 체홉이 보여준 것은 삶 그 자체였다.


평범함 속에 숨은 드라마

체홉 이전의 연극은 달랐다. 왕자가 복수를 하고, 귀족이 몰락하고, 비밀이 폭로되는 식의 극적인 사건들이 무대를 지배했다. 그러나 체홉은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의 대표작 『갈매기』는 희극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만, 실은 젊은 작가의 좌절과 여배우 지망생의 추락을 그린다. 중요한 사건들—누군가의 결혼, 동거, 아이의 죽음—은 무대 밖에서 일어나고, 등장인물의 대사로만 전달된다. 왜 이렇게 했을까? 체홉이 주목한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내면이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큰 일이 일어나서 힘든 게 아니라, 그 일을 혼자 감당해야 할 때,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 때 더 힘들다. 체홉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갇혀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진심을 전하지 못한다.

『갈매기』의 니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자기 이야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체홉이 포착한 현대인의 고독이다. 연결되어 있지만 단절된, SNS로 소통하지만 정작 외로운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웃음 뒤에 숨은 눈물, 눈물 뒤에 숨은 웃음

체홉 문학의 가장 큰 특징은 희극과 비극이 한 몸처럼 얽혀 있다는 점이다. 『관리의 죽음』이라는 단편을 보자. 극장에서 재채기를 한 하급 관리가 앞자리의 장군에게 침이 튀었다고 사과하고 또 사과하다가, 결국 스트레스로 죽는다는 이야기다. 읽으면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웃고 나면 씁쓸함이 밀려온다. 권위 앞에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작은 사람의 비애가 보이기 때문이다.

『베짱이』라는 작품은 더 아프다. 예술가 행세를 하며 남편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던 여자가, 남편이 죽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깨닫는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나서야,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후회한다. 그때는 이미 늦었다. 여기서 체홉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는 인물을 선이나 악으로 재단하지 않는다. 관리도, 베짱이 같은 아내도 그저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체홉은 판단을 내리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삶을 어떻게 보십니까?”

image.png 1900년 러시아 크림반도 얄타에서 만난 체호프(왼쪽)와 톨스토이. @위키미디어커먼스
image.png 체홉 Ⓒwikipedia

거리의 미학

찰리 채플린은 이런 말을 남겼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1977년 가디언지가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며 인용한 이 말은 그의 영화 철학을 압축한다. 그런데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정반대로 말했다. “개인의 생활을 전체적이고 보편적으로 개관하면 본질적으로는 한편의 비극이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면 희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루하루의 활동과 괴로움, 순간순간의 조롱, 각 주간마다의 소망이나 공포... 이것들은 언제나 나쁜 장난을 치고 있는 뜻밖의 재난으로 인한 희극적인 장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보면 작은 기쁨들이 있어 희극 같지만, 멀리서 전체를 보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비극이라는 것이다.

누가 맞을까? 체홉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두 시선을 동시에 요구한다. 무대 위 인물들의 고민에 빠져들었다가도, 한 발짝 물러서면 그들의 몸부림이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그러다 다시 가까이 다가가면 그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진지한 절망이 느껴진다. 이것이 우리가 체홉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 가까이서만 삶을 본다. 내 문제, 내 고통, 내 불행에 갇혀 있다. SNS를 열면 다들 행복해 보이고, 나만 불행한 것 같다. 하지만 체홉을 읽으면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지고 산다는 것과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속으로는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동시에 체홉은 우리에게 거리를 두는 법을 가르친다. 지금 당장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웃을 수 있는 추억이 될 수도 있다. 지하철을 놓쳐 지각한 날도, 동료와 다툰 날도, 할인 도시락을 먹은 저녁도 언젠가는 “그때는 그랬지” 하고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삶이라는 이름의 무대

체홉의 『벚꽃 동산』은 몰락하는 귀족 가문의 이야기다. 선조 대대로 내려온 저택과 아름다운 벚꽃 동산을 잃게 된 사람들의 마지막 날이 비극인가? 그런데 막상 무대 위 인물들은 슬퍼하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고, 농담을 하고, 사소한 일로 다툰다. 정작 큰 일을 앞두고도 일상은 계속된다. 이것이 체홉이 포착한 삶의 진실이다. 삶은 희곡 대본처럼 명확하게 희극이나 비극으로 나뉘지 않는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때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하다.

오늘도 우리는 체홉의 무대 위의 인물처럼 지하철을 놓치고, 사소한 일로 다투고, 할인 도시락을 먹으면서 산다. 누군가 내 하루를 무대에 올린다면 희극일까, 비극일까? 체홉이라면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그건 당신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일상을 체홉은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미소 짓고 있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연극인가? 답은 당신이 그것을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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