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길:
도스토옙스키의 대지주의

위대한 문학의 나라, 러시아

by 이헌철
image.png 도스토옙스키 Ⓒwikipedia

1836년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러시아 지식인 사회를 뒤흔들었다. 귀족 출신 사상가 표트르 차다예프가 쓴 이 편지에는 충격적인 문장이 담겨 있었다. “러시아는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다.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 교육에서 소외되었다.” 젊은 작가 헤르첸은 이 편지를 “밤중에 울린 총성”이라 불렀다. 잠들어 있던 러시아를 깨운 외침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잔인한 말도 없다. ‘당신이 동양인도 서양인도 아니라는 것이고, 세계 문명의 역사에서 빠진 존재라는 의미였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분노했고, 동시에 깊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질문하기를 ‘그럼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을 둘러싼 논쟁은 러시아를 두 진영으로 갈랐다. 서구파와 슬라브파였다. 이들의 싸움은 1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서구파, 유럽을 향해 달리다

서구파의 논리는 명쾌했다.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는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발전 단계의 차이일 뿐이다. 서구는 앞서 있고, 러시아는 뒤처져 있다. 따라서 해법은 서구를 따라잡으면 된다. 문학비평가 벨린스키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합리성이지, 미신과 낡은 전통이 아니다.” 그의 펜은 사회 변혁을 향한 날카로운 칼이었다.

당시 러시아의 현실은 참담했다. 농노제 아래 농민들은 귀족의 재산처럼 매매되었고, 정교회는 황제의 도구로 전락했으며, 언론은 검열에 시달렸다. 서구파는 유럽을 바라보았다. 표트르 대제는 서구파에게 영웅이었다. 18세기 초, 표트르 황제는 러시아를 강제로 서구화했다. 귀족들에게 수염을 자르라 명령했고, 유럽식 복장을 강요했으며, 서구 기술을 대대적으로 도입했다. 서구파는 말했다. “표트르가 시작한 혁명을 완성해야 한다. 겉모습만 바꾼 것이 아니라 제도와 사상까지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


슬라브파, 러시아의 영혼을 외치다

슬라브파의 반박은 감정적이면서도 철학적이었다. 호먀코프와 악사코프 형제 같은 사상가들은 주장했다. “러시아는 서구보다 뒤처진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다름이야말로 러시아의 진정한 힘이다.” 그들이 본 서구는 병든 문명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로 분열된 기독교, 개인주의로 파편화된 사회, 자본주의로 물질화된 인간관계로 병든 사회였다. 반면 러시아에는 아직 살아있다는 주장이다. 정교회의 영적 전통, 농민 공동체인 상부상조 정신, 차르와 백성이 하나 되는 유기적 사회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슬라브파에게 러시아는 서구가 잃어버린 영혼을 간직한 땅이었다.

표트르 대제에 대한 슬라브파의 평가는 정반대였다. “그가 러시

아를 망쳤다.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하며 서양 놀이에 빠졌고, 농민들

은 버려졌다. 영혼 없는 관료제만 득실거리게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들의 해법은 표트르 이전으로 돌아가고, 러시아의 진정한 뿌리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슬라브파도 순수한 보수주의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들 역시 농노 해방과 언론의 자유를 원했다. 다만 방향이 달랐다. 서구의 모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고유의 전통, 특히 정교회 정신에 기반한 개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 두 진영의 경계가 생각보다 흐릿했다는 데 있다. 많은 지식인들이 평생 두 진영 사이를 오갔다. 젊었을 때는 서구파였다가 나이 들어 슬라브파가 되기도 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의 글에서도 양쪽 요소가 뒤섞여 나타났다. 사실 두 진영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었다. 농노제는 폐지되어야 하고, 현재의 러시아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러시아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는 처방전이었다. 서구파는 유럽의 약을 먹자고 했고, 슬라브파는 러시아 고유의 치유법을 찾자고 했다.

차르 정부는 양쪽 모두를 탄압했다. 서구파는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탄압했고, 슬라브파는 정부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탄압했다. 1853년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자 논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구파는 “근대화하지 않아서 졌다”고 했고, 슬라브파는 “서구를 흉내 내다가 우리 고유의 힘을 잃었다”고 반박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제3의 길을 찾은 사람

이 치열한 논쟁의 한가운데, 한 청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였다. 28세에 사형 선고를 받은 그는 1849년 12월 22일 새벽, 총살대 앞에 섰다. 죄명은 금서 낭독이었다. 총구가 그를 겨누었고, 죽음이 1분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 말을 탄 전령이 달려왔다. “사형 중지!” 황제의 특사였다. “사형 중지! 시베리아 유배!” 청년은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론과 관념이 얼마나 공허한지였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살아서 숨 쉬는 것이고, 이 땅을 밟고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감옥에서 만난 진짜 러시아

시베리아 옴스크의 감옥은 지옥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곳에서 4년을 보내고 이어진 5년간의 강제 군복무였다. 총 10년에 가까운 벌이었다. 귀족 출신 작가가 살인자, 도둑, 강간범들과 같은 방에서 잤다. 유일하게 허락된 것은 성경이었다. 처음에는 죄수들이 귀족이라는 이유로 그를 미워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해를 넘어 존경하게 되었다.

어떤 살인자는 죽기 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어떤 도둑은 마지막 빵을 아픈 동료에게 나눠줬다. 글을 한 자도 읽지 못하는 농민이 선과 악을 본능적으로 구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깨달았다. 민중은 계몽되어야 할 무지한 대중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지식인들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성, 이론 없이도 발견하는 진리, 삶으로 체득한 지혜였다.

사회주의자였던 청년은 기독교 인도주의자가 되어 돌아왔다. 서구파였던 그는 이제 서구파도 슬라브파도 아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서구파도 슬라브파도 아닌 길

1861년, 유배에서 돌아온 도스토예옙스키는 형 미하일과 함께 잡지 『시대』를 창간했다. 그리고 “서구파도 틀렸고, 슬라브파도 틀렸다.”고 선언했다. 옛 친구들은 배신자라고 욕했지만 그는 자신의 길을 갔다.

서구파의 문제는 명확했다. “프랑스 사회주의를 수입해서 러시아에 심는다고? 프랑스 땅과 러시아 땅은 다르다. 같은 씨앗도 다른 열매를 맺는다.” 서구파는 뿌리가 없었다. 관념만 있었다. 민중과 단절되어 있었다. 슬라브파의 문제도 분명했다. “표트르 이전 러시아가 천국이었다고? 농노제가 있던 그때가?” 슬라브파는 과거를 미화하고, 현실을 도피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본 진짜 러시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니었다. 고통받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곳이었고 죄를 지으면서도 구원을 갈망하는 곳이었다. 모순 속에 살아 숨 쉬는 땅, 그는 이것을 ‘대지’라고 불렀다. 포치바(pochva), 단순한 흙이 아니라 살아있는 경험, 구체적 삶 그리고 뿌리를 의미했다.


대지에 엎드려 입맞추라

그의 사상은 마지막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완성된다. 조시마 장로는 제자 알료샤에게 말한다. “땅에 엎드려 입 맞추고 눈물로 적셔라. 그러면 네 눈물이 대지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모래 한 알, 나무 잎 하나, 햇살 하나까지 사랑하라.” 그런데 조시마는 알료샤를 수도원에 가두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으로 보낸다. “기도만 하지 말고 사람들 속으로 가라. 고립이 아니라 연결하고 관념이 아니라 행동으로, 이론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라.”고 한다.

image.png <까라마죠프 형제들> 1880년 출판본 제목 페이지


『죄와 벌』의 라스콜리코프는 서구파 지식인의 화신이다. 그는 이론을 믿었다. ‘비범한 인간은 범인을 희생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살인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를 구원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창녀 소냐의 사랑이었다. 소설 마지막 장면에서 라스콜리코프는 땅에 엎드려 키스한다. 대지와 다시 연결되는 순간, 그는 새로 태어난다.

도스토옙스키가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식인들이여, 대지로 돌아가라. 민중과 다시 연결되라. 관념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라. 하늘을 보되 발은 땅에 단단히 딛고 서라.”

도스트옙스키의 <죄와벌>


완벽하지 않은 사상

대지주의는 아름다운 사상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서구의 좋은 것은 받아들이되 뿌리는 지켜라? 민중과 연결되되 그들을 이상화하지 말라? 정교회 전통을 지키되 맹목적 전통주의는 거부하라? 이것은 어쩌면 외줄타기 같은 것이었다. 비판도 많았다. 서구파는 그를 보수 반동이라 불렀고, 슬라브파는 그가 충분히 러시아적이지 않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완벽하지 않았다. 때로 극단적 민족주의로 기울었고, 반유대주의적 발언도 했다. 하지만 그의 핵심 통찰은 여전히 빛난다. 추상과 구체, 이론과 경험, 보편과 특수,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한 길은 둘을 연결하는 것이다. 그 연결의 매개가 바로 '대지', 즉 살아있는 구체적 삶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대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대지'는 어디에 있는가? 한국을 보자. 우리는 100년 만에 농업국가에서 IT강국이 되었다. K-문화가 세계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행복한가? 청년들은 'N포 세대'라 불리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다.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대지와의 단절이 아닐까? 그런데 희망적인 사례들이 있다. 최근 젊은 창작자들 중에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할머니에게 배운 김치 담그는 법을 유튜브에 올리고, 시골 마을의 폐교를 문화 공간으로 되살리는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은 거창한 세계화를 꿈꾸지 않는다. 다만 자신이 딛고 선 땅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낼 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진솔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이것이 바로 대지주의다. 뿌리를 잃지 않으면서 세계와 소통하고 구체적이되 보편적이고, 전통을 지키되 혁신하는 것이다. 150년 전 도스토옙스키가 꿈꾼 길을 21세기 한국의 예술가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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