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도 못한 것이 도주하기까지 정말 비겁한 인간이다.
노곤하다. 노을과 함께 저물고 싶다.
모든 것이 무너진 7년 전,
마트에 들러 소주 두 병과 캠핑용 숯, 그리고 삼겹살을 조금 샀다. 요즘은 번개탄 단독 판매가 까다롭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사장님이 이상하게 보고 말리면 어떡하지?'
'나중에 알게 되면 사장님이 괴로워하지 않을까?'
캠핑용 숯 봉지를 사는 이유는 그 속에 든 점화용 번개탄을 얻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구색을 갖추려 산 삼겹살은 마트 주인이 나중에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는 마지막 배려였다. 떠나는 길까지 타인에게 마음의 부채를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인연을 후련하게 털어내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사장님은 내가 삼겹살을 구워 먹을 거로 생각하겠지. 혹시라도 알게 되더라도 캠핑가서 고기 구워 먹다 일산화탄소 중독되었다고 위안 삼겠지. 그게 나도 편해.’
서해는 서운할 정도로 가까웠다.
그는 생의 마침표를 찍을 장소로 서해를 택했다. 서해는 서운할 정도로 가까웠다. 30분 정도 운전을 해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열자, 비릿하고 짠 바다 공기가 훅 끼쳐왔다. 그 꼬리꼬리한 냄새는 아직 그가 살아있음을 일깨웠다.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붉은 태양 빛이 물결에 부딪혀 부서질 때마다 태양이 서서히 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만 지켜보았다.
‘저 반사된 황금빛이 다 사라지면 나도 사라지겠지.’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태양을 어둠이 삼켜버리고 나서야 그는 몸을 움직였다. 준비한 깡통에 종이와 번개탄을 넣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차오르는 것을 기다리며 소주병을 땄다.
‘젠장, 종이컵도 없고 안주도 없네. 생라면이라도 사 올걸.’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이 사소한 결핍에 투덜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헛웃음이 나온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약통을 꺼냈다. 그 안에 든 쌀알 모양의 작은 알약 3개. 한 알만 먹어도 서 있는 상태에서도 잘 수 있는 강력한 수면제다. 벤조디아제핀을 사용할 수 있었지만 술과 같이 먹었을 때 죽음의 고통이 심할까 봐 쌀알 모양의 약을 선택했다. 벤조디아제핀을 술과 함께 먹이고 그 고통을 바라보는 자는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움을 피하고 싶은 찌질함에 의한 선택을 한 것이다.
벤조디아제핀을 술과 함께 먹이고
그 고통을 바라보는 자는 사이코패스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 곁에 아무도 없음은 또 다른 두려움을 일으켰으나 오히려 죽음의 문 앞에 혼자인 것은 위안이 되었다.
‘그래, 나 혼자 먹게 돼서 참 다행이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족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라서 다행이라는 비극적인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는 소주와 함께 약을 삼켰다. 이제 30분. 정신이 혼미해지면 번개탄의 일산화탄소가 몸속 산소를 몰아내고 그의 육신을 차갑게 굳힐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때는 찌질함을 숨기는 제어장치가 고장이 난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는 남기고 싶었다. 목소리를 들려줄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였기에, 그는 마지막 문자를 작성해 갔다. 많은 내용을 쓰기에는 그리고 다시 고쳐 쓰기에는 졸음이 밀려온다.
‘미안해.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 결국 이렇게 깨버려서 정말 미안해.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 싶은데, 당신 가슴에 못 박았던 일들만 자꾸 떠오르네. 미안했어, 그리고 고마웠어.’
문자를 전송함과 동시에 의식의 추가 급격히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부서진 안식 : 이것조차 뜻대로 안 되는구나
‘여기가 어디지?’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 속에 누군가 멀리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승의 입구에 당도한 것이라 믿었다. 날카로운 유리창 파쇄음이 고막을 찌르고, 기계적인 경고음이 비명처럼 이어졌다. 속은 뒤집힐 듯 메스꺼웠으나 몸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다시 암흑 속으로 도망치듯 정신을 놓았다. 망각의 강을 건너 모든 고통을 잊고 평온해지기만을 간절히 바랐으나, 삶의 끈은 끈질기게 그를 붙들고 있었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을 때, 그는 관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워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고, 접착제를 붙여놓은 듯 눈꺼풀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아스라하게 들려왔다.
‘나의 장례식인가.’
감은 눈 위로 부신 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니 이곳이 천국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었다. 지독한 어지럼증에 그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무거운 눈꺼풀이 들리고 백색 천장이 뿌연 시야에 들어왔다. 초점이 흐릿한 망막 너머로 낯익은 얼굴, 아내가 보였다.
“오빠,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나중에 소연이가 커서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말해야 해? 오빠만 죽고 싶은 줄 알아? 아이만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죽었을 거야. 어떻게 마지막까지 이렇게 이기적일 수 있어!”
아이만 아니었으면
내가 먼저 죽었을 거야!
터져 나오는 통곡과 함께 아내가 울부짖었다. 억누르던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그 절규 앞에 단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자신의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 믿었으나, 정작 사랑하는 이가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몇 곱절은 더 잔인한 형벌임을 그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심장을 찔렀다. 몸이 어느 정도 추스러지자 그는 도망치듯 병원을 나섰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이라기보다, 자신의 존재가 가족에게 더 큰 재앙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비겁하고도 처절한 퇴장이었다.
대근 약사로 타인의 빈자리를 채우는 삶
울부짖는 아내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선 그에게 남은 것은 부서진 자존심과 숯불 향이 가득 밴 옷뿐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스스로의 죽음보다 더 잔인한 형벌임을 깨달은 그는, 속죄하듯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무작정 사람이 없는 곳을 향해 갔다.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걸었다. 칠흑 같은 밤에 하나의 불빛만 있었다. 세면대 구멍으로 물이 빨려 들어가듯이 그곳을 향했다. 웨스트 가든 모텔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05호가 되었다.
시골 마을의 약국들은 대개 약사 한 명과 직원 한 명이 전부인 '1인 약국' 체제다. 보조약사를 구하려고 해도 시골까지 오는 젊은 약사들은 드물어서 홀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시골 약국이 평소엔 평온해 보여도 약사에게 경조사가 생기거나 병이라도 나면 상황은 급변한다. 병원 문이 열려있는데 약국이 닫히는 것은 지역 보건의 흐름을 끊는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당이 아무리 비싸도 이 외진 시골까지 선뜻 내려올 약사를 구하기 또한 하늘의 별 따기였다. 105호는 바로 그 틈새, 지방 약사회에서 모집하는 ‘대근(代勤) 약사’ 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대근약사에 이름을 올렸다.
다시 살게 된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모든 재산을 잃고 신용까지 바닥난 그에게 자기 약국을 다시 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남의 밑에서 정규직으로 일하기엔 이미 나이가 많다. 하지만 하루 일당이 높고, 먼 곳까지 이동할 경우 교통비 명목의 가산금까지 얹어주는 대근 약사 제도는 105호에게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는 매일 새벽, 웨스트 가든 모텔의 낡은 문을 열고 낯선 마을로 향했다. 이름 모를 약국의 조제실에 앉아 타인의 빈자리를 대신 채우며, 그의 일그러진 삶도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장거리 운전을 하고 매일 익숙지 않은 곳에서 일을 해야 하지만, 손끝에 잡히는 일당 봉투는 그에게 가느다란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주었다. 지출을 극도로 줄이며 웨스트 가든 모텔의 좁은 방에서 버텨낸다면, 언젠가는 가족 앞에 고개를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그의 지친 어깨를 다독였다.
105호의 침묵 : 내가 과거에 저 모습이었겠구나
흰 천에 덮인 채 들것에 실려 퇴실한 부부가 묵었던 201호의 빈 침대를 보며, 105호는 서해 앞바다에서 맡았던 번개탄의 연기를 다시 느꼈다. 서해의 언덕 위, 차오르는 연기 속에서 졸피뎀 세 알을 삼키며 간절히 바랐던 그 안식이 누군가에게는 이 비좁은 모텔 방에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어색한 부러움과 허무함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105호는 7년 전, 안식을 위한 시도가 실패한 후 아내의 절규를 뒤로하고 병원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 결심했다. 살아서 가족의 가슴에 가시가 되느니, 차라리 행방불명된 채 죽은 듯 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흘러든 곳이 이곳 웨스트 가든이었다. 이곳은 낙오된 철새들이 풀숲에 몸을 숨기듯, 존재를 지우고 싶은 자들이 모여 서로의 과거를 묻지 않는 거대한 '망각의 수용소'였다.
두려움을 잊기 위해
피부가 쓰라려도 계속 면도를 하였다.
경찰이 '민폐'라며 고함 소리를 내뱉을 때, 105호는 자신의 방에서 나가질 못했다. 그때의 두려움이 엄습해 뭘 해야 할지 몰라 아침에 했던 면도를 또다시 했다. 아무리 전기 면도기라 하더라도 눌러하는 면도에 쓰라림이 느껴진다. 뭐라도 해야 201호에 악령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작은 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면도밖에 없었다. 거울 속 희고 깨끗한 얼굴은 여전히 약사 시절의 단정함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 속 총명함은 이미 오래전 서해 밑바닥에 가라앉은 채 떠오르지 않았다.
201호의 잘 열리지 않는 창문이 힘으로 젖혀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원한 맺힌 영혼이 나가라는 배려라지만, 105호는 알고 있었다. 저 창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한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침대 위에 남은 마지막 온기일 뿐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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