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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 Mar 01. 2024

회복의 정착

영화 <추락의 해부> 스틸

며칠 째 신나게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 보기는 취미이자 특기였는데, 출판 편집자가 된 후론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는 일이 좀 버거웠다. 다른 편집자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고. 


편집자가 된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 시간 만큼 힘든 시절이 없었다. 한 편의 책을 기획하고, 작가를 발굴하거나 만나는 일, 책을 만드는 과정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만, 감정 노동이 상상 이상으로 큰 만큼 마음의 체력은 빠르게 소진됐다. 그 밖의 부침에 대해서는 언급을 삼가는 편이 쓰는 나와 읽는 누군가에게 유익할 것이므로.


영화로 만나는 세상을 얼마나 즐거워했는지를 회상하면 웃음이 난다. 새벽 4-5시면 일어나 영화 한 편으로 보고 첫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곧장 영화관으로 뛰어가던 일은 연인과의 데이트 못지 않은 희열이었다. 방학 때는 새벽 수영을 갔다가 조조 영화를 보기 일쑤였고, 뜻이 맞는 친구와 하루 종일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걸으며 소요하는 일로부터 시간의 충만함을 느끼곤 했다. 


자랑할 만한 일이었다. 영화를 그토록 많이 보며 공부했던 지난 시간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국 영상자료원까지 가서 어둠의 경로로도 구할 수 없는 지난 영화들을 보고, 외국 영화 잡지를 탐독하며 스스로 즐거워했다. 더없이 명랑하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시간. 잃어버린 재능의 기억. 영화 한 편에 집중하지 못하고 영화관을 뛰쳐 나오기 일쑤였던 편집자 시절은 그래서 더 괴로웠다.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을 해낼 수 없음이, 내 상태가 달라져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고통스러웠다.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이 일을 그만두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확신이 되어갈수록 더 그랬다. 




편집자로 평생 살 것 같았던 나는 2년 전 등을 돌렸다. 아 정확히는 소속 편집자를 그만둔 것이다. 앞으로도 출판사에 소속된 편집자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박리된 이후로 2년이 지난 얼마전까지도 회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것 같았고, 회복이 된 것 같다는 감각에 자꾸만 속았기 때문이다. 조금은 조심스럽지만 지금은 감히 스스로 회복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때의 괴로움을 많이 잊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음의 체력이 많이 올라왔다. 감정을 가져다 바치는 일이 줄어든 만큼 내 감정을 영화 감상의 땔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마음껏 좋아하고 마음껏 빠져들 수 있었다.


영화 <가여운 것들> 스틸


최근엔 연달아 영화 네 편을 봤다. 재작년 화제작부터 근작까지 아주 좋은 영화들을 연달아 봤다. 영화 감상을 기록으로 남겨둘까 싶었지만, 이 뿌듯함을 혼자만 간직하는 일이 퍽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자랑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좋아 영화를 찾아본 경험이 너무도 오랜만이었기에 그 사건을 존중하고 싶었다.


영화 한 편을 멈추지 않고 끝까지 봤다는 사실이 자신감으로 치환된다.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감각 일부를 되찾은 기분이다. 한창 힘들었던 시절엔 점심 식사 메뉴를 고르다 도무지 무얼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서 엉엉 운 일이 있었다. 어떤 선택도 자신감이 없어서 해낼 수 없던 때였다. 결정권을 모두 빼앗긴 시간들을 보내는 동안 나는 그렇게 병들어버렸다.


지금은 커피 메뉴도, 식사 메뉴도 잘 고른다. 보고 싶은 영화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 어떤 선택지 앞에서 얼음이 되는 일도 이제는 겪지 않는다. 무언가 마시고 싶고, 먹고 싶다는 감각은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보려는 마음의 정체와 같아서 너무도 소중하다. 


최초로 원치 않은 퇴사 후 휴식의 시간을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개인적인 경사 때문에 쉬고 있는 터라 지금의 휴식은 달가운 것이다. 물론 갑작스레 주어진 휴식에 얼떨떨한 건 사실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만큼 일을 멈춘 상태에 마냥 적응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다쳐서도 건강을 잃어서도 아닌 좋은 일 때문에 일로부터 멀어진 것은 생각해보면 얼마나 행운인지.


회복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회복을 바랄 수도 없을 만큼 망가졌던 암흑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지나갈 줄 몰랐기 때문에 비통이 없는 현재를 보내는 일이 어색하지만 더없이 감사하다. 


영화 <파묘> 스틸

이번 주 일요일에는 <듄: 파트 2>를 보러 간다. 팝콘도 먹을 것이다. 설레는 계획이다.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장재현 감독의 신작도 보러 갈 예정이다. 오스카 시즌에 맞춰 앞다투어 개봉되는 오스카 후보작들도 섭렵해보려고 한다. 그런 계획들로 하루를 채우는 일이 기껍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라는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모라토리움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유예인데, 그렇게 이해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모라토리움은 회복에 가깝다. 다마코가 아버지 집에서 에어컨을 빵빵 틀고 이불을 덮고 뒹굴뒹굴 누워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던 시절을 지나 씩씩하게 다시금 상경할 수 있었던 건, 어떤 한 시절을 유예해서가 아니라 회복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는 알 수 있다. 


회복이 정착하려나 보다. 섣부르게 반가운 마음을 벌써부터 먹어본다. 잃어버릴까 불안해하는 대신 꽉 잡으려는 의지를 다해. 


영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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