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에 가기로 결정한 뒤에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비자를 따고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집주인과 컨택해서 입주 예약을 했고 은행 계좌를 만들고 나를 상징하는 반팔과 반바지 슬리퍼와 개털 잠바를 챙겼다. 떠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내 포부를 전하고 작별을 고했다. 이세계 입구에 다다르는 길은 정신없었다. 유튜브에서 한번 본 공항 가는 기차를 타보기로 했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엄청나게 뛰었다. 기차에 타서 내릴 때까지 급한 마음에 내가 떠난다는 것에 실감이 들지 않았다. 다행히 도착은 생각보다 여유 있어서 다른 항공사 줄을 10분 정도 선 것은 아무 문제없었다. 끝까지 배웅해 준 여자친구와 마지막 간식을 나눠 먹고 끝내 눈물을 흘린 여자친구를 보며 내 위로 거대한 무엇인가가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책임감과 두려움, 불확실성 비난과 조소 등이 섞여 있는 기체에 가까웠다. 이산화탄소로 불을 끄듯이 내가 믿고 있던 나라는 존재의 횃불을 자꾸만 꺼트리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갔던, 내가 나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결국 그 시간이 왔다. 게이트를 넘어갈 때, 더 이상 나를 보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여자친구의 뒷모습을 끝까지 보다 뒤를 돌아 이세계로 넘어가는 게이트를 건넜다. 한걸음, 한걸음.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내게 연결되어 있던 족쇄들이 하나씩 끊어진다. 발걸음은 무엇인가 후련하며 가벼웠고, 나를 짓누르는 기체는 점점 더 짙게 나를 내리찍는다. 족쇄들이 하나씩 끊어질 때마다 나는 다시 불을 피운다. 괜찮다고. 이방인이 되는 것은 늘 있던 일이었다고.
어두운 곳을 불을 켜지 않고 갈 수 있는 것은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하지만 정전이 났는데 무엇인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다면 사람은 멈출 수밖에 없다. 하물며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암실일 때는 어떨까? 아무도 당당하게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약간의 불빛이라도 켜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겨우 눈앞이나마 볼 수 있는 양초라도 말이다.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거대한 암실 같은 이세계를 나아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양초에 불을 붙였다. ‘나’라는 양초를. 나는 날 믿으니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아. 늘 그랬듯이. 기체가 내 시야를 가릴 때마다 나는 휘휘 휘저으며 앞으로 내게 닥칠 일들을 준비했다. 경유지 도착예정이라던지, 충전기와 지갑을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방법, 시간 때우는 방법 등을 생각하며 탑승구 입구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뜰 때까지 시간이 조금 남은 덕분에 나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통화를 걸었다. 가족들과 여자친구, 그리고 친구들. 이전 회사에서 알고 지냈던 고마운 사람들까지 전화를 마치자 어서 비행기를 타라고 재촉하는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내 좌석에 앉았다. 마지막까지 여자친구와 카톡을 주고받았던 비행기가 움직이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핸드폰의 전원을 껐다. 그렇게 내게 걸려있던 모든 족쇄가 끊어졌다. 그동안 쌓아왔던 ‘나’라는 정체성을 이루어주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진짜’ 이세계로 출발한 것이다. 나는 호주라는 나라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내가 비행기로 내리는 멜버른이라는 도시가 어떤 곳인지, 내가 가서 살게 될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암실 그 자체인 상태로 이세계로 떠났다. 남들에겐 일반 상식인 이런 기본적인 지리조차 나는 알지 못했다. 평생 한국 떠나서 살 일 없는 내게 각 나라의 수도를 아는 게 무슨 상식이냐며 예능 프로에서 종종 나오는 수도 문제를 비판했던 결과이다.
다행히 내가 몰라도 비행기 기장은 나를 멜버른에 무사히 옮겨주었다. 나는 중국 항공을 이용했는데, 상해에서 경유한 뒤 멜버른으로 가는 경로였다. 경유를 기다리는 동안 새로 발급받은 트레블 카드의 실적을 채우면 라운지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급하게 카드를 받았다. 당월에 받으면 된다, 안된다 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들렀던 은행 지점에서 직접 본사와 카드에 전화를 해주고, 라운지 담당자 전화번호까지 알려주는 친절을 통해 카드를 발급한 당월에는 언제든 30만 원을 사용하면 이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받았던 터라 굉장히 기대가 되었다.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게 되다니 다른 건 몰라도 살면서 처음 겪는 호화 생활에 대한 기대가 컸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내가 그 호사를 누리게 되는 일은 없었다.
경유지에 도착하자마자 해당 라운지를 찾으려고 분주히 뛰어다녔다. 일단 와이파이를 잡는 게 우선이었는데, 인증 오류가 계속 떴는데 연결을 계속 시도한 결과 차단을 당했기 때문에 인터넷이 되지 않았다. 일단 해당 라운지가 내가 탈 게이트 옆에 있다는 간략한 소개를 보고 찾을 수 있겠지.. 하고 가봤지만 게이트 옆에 vip라운지라고 적혀 있는 곳은 문을 닫은 것처럼 보였다. 안에는 내부 공사 중인 느낌?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뭐 하고 포기를 했던 찰나에 내가 찾던 vip 라운지랑 숫자가 다른 것을 알게 되었다. 이건 아니구나 하고 정말 그 주변을 한두 시간을 걸으면서 계속해서 찾았다.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어 결국 와이파이나 찾아보자 하고 돌아다니면서 봤던 와이파이 자판기 같이 생긴 곳에 갔다. 와이파이를 사용하려면 여권을 스캔하라는 문구가 보여서 순간 고민을 했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뭔가 억울하기도 하고 찾아보고 싶었다. 처음 찾아온 호사인데!
여권을 중국에 스캔시켜 주고 와이파이를 연결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인터넷이 거의 안 되는 수준으로 느렸기 때문이었다. 카톡은 당연히 안되고.. 그래도 그 안 되는 인터넷으로 겨우겨우 해당 라운지의 실체를 확인했다. 입구부터가 내가 찾던 모습과 다르고 분명 어딘가 다른 길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가는 길은 사진이 열리지 않아서 포기하고 다시 찾으러 떠났다.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찾는 것과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찾는 것은 전혀 다르다. 나는 게이트 쪽에서 나와 내가 왔던 길로 되돌아갔고, 어느 정도 돌아가다 포기하자며 다시 게이트 쪽으로 돌아갔을 때 해당 라운지로 가는 샛길을 찾았다. 게이트 쪽으로 들어가는 반대쪽에 vip라운지 2층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던 것이었다. 해냈다는 마음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못 찾은 내가 참 생각이 너무 갇혀 있었구나 하는 자조석인 생각을 하며 라운지에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받은 라운지에서의 첫 서비스는 영업시간이 끝나서 죄송하다는 안내 멘트였다.
누굴 뭐 탓할 것도 없고 또 일이 잘 풀리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잘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하고 다시 게이트 앞에 자리를 잡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문득 카톡이랑 네이버만 안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메신저로 보내봤는데 아주 아주 인터넷이 잘 되는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으면 딱히 어떤 준비도 하지 않는 성격이다. 나는 꽤 상식적인 사람이고 상황에 맞춰서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문제는 금방 해결할 수 있고, 나는 그런 불확실성에서 피어나는 결과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계획을 짜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역시 손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처음 가는 곳에서 이렇게 손해를 보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런 뼈아픈 손해는 뇌리에 깊게 남아 다음에 실수를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길게 아프진 않다. 툭툭 털고 다음 상황을 즐기면 된다.
근데 이번엔 좀 길게 갔다. 아니.. 라운지 진짜 한 번 가보고 싶었는데.. 내려서는 못가나 하는 생각에 찾아봤지만 타기 전에 가는 거라 그건 안되더라.. 아직도 아쉽다. 뭔가 나도 으른이 된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땐 꼭 실패하지 말자 생각하고 다시 한번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항공을 타면서 느낀 점은 진짜 중국이 돈이 많긴 한가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캐리어 2개를 그냥 실어준다길래 이상했는데, 옆에 사람이 듬성듬성 비어있는데도 그냥 출발했다. 게다가 앞뒤 좌석 간격이 내가 여태 타봤던 비행기 중에 가장 넓었다. 가격도 가장 싸고.. 무엇보다 기내식이 여태 탔던 비행기 중에 가장 맛있었다. 물론 기내식을 먹을 정도로 타본 것이 십몇 년 전이라서 기술이 발전해서 일 수도 있지만 진짜 맛있었다. 솔직히 인터넷에 워낙 악평도 많고 중국이라는 단어가 주는 걱정이 있었는데 출발할 때부터 친절함과 경유, 타고나서의 만족감은 여태 탔던 모든 항공사 중에 최고였다.
딱 하나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면이냐 밥이냐 물어봐서 밥이라고 했는데, 잠시 뒤에 쏘리 하다면서 무엇인가 말했을 때였다. 당연히 밥 없다고 하는 줄 알고 괜찮다고 했더니 밥이 나왔다. 읭? 하고 뭐 없는 줄 알았는 데 있었나 보다 하고 그냥 먹었는데 다 먹을 때쯤 갑자기 와서 나한테 면을 하나 더 주고 갔다. 나한테만 줬길래 대체 아까 뭐가 죄송하단 거였을까 내 덩치를 보고서 음식이 남는데 더 먹어 줄 수 있냐는 것을 물어본 것이었을까.. 물론 사양 않고 맛있게 먹었다. 나는 자타공인 면쟁이인데, 역시 본국이라 그런지 면보다는 볶음밥이 진짜 맛있었다. 중국인 친구가 로컬 음식점에서 잘 나가는 메뉴라고 한 끼 먹자고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좌석에는 앞자리 뒤통수 쪽에 비즈니스석처럼 화면이 달려 있어 영화나 음악, 비행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고도는 어떤지 알 수 있었고 카메라로 바깥 풍경을 볼 수도 있어 비행기에서의 열몇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6년 정도 미뤄왔던 소설책을 완독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게이트는 이세계와 연결되었다. 이제 짐을 챙겨 나가면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실에 도착하는 것이다. 아까 밥 주는 것도 못 알아들은 내가 이곳에서 일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꿈을 준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발을 보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나는 어딘가를 가야 할 때 내가 걷는 발을 본다. 그 뒤에 걸어온 길과 풍경을 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의식 같은 셈이다. 그 뒤엔 뭔가를 써야 하는 종이를 해석 못해 와이파이를 연결해 번역기를 돌렸고 입국 심사에서 뭐라고 얘기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길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그냥 나왔다? 처음엔 나온 지도 몰랐다. 여권을 사람들이 기계에 하나씩 스캔하길래 그냥 따라 하고 사진 찍고, 아까 번역기 돌린 종이 주니까 짐 찾는 곳이었다.?? 굉장히 프리한 나라구나 생각하면서 캐리어를 찾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이세계 호주에 도착하고 나서 내뱉은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진짜 존나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