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이 그렇게 좋았을까? 일단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청명한 가을이었다. 그러니까 길을 걷다 편의점을 들렀을 때, 어? 벌써 호빵이 나오네? 할 때의 그 날씨. 누군가는 외투를 입고
"쌀쌀하네?"라고 하고 옆 사람은 반팔 반바지에 쓰레빠를 신는 날씨. 여름의 싱그러운 향기가 서서히 무채색으로 물들기 위해 피날레를 준비하는, 길어진 여름과 겨울 사이에서 이제는 기지개를 켜지 못하는 그 날씨였다. 나는 언제나 가을이 좋았다. 조용하고 시원한 그 바람이 이제 땀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를 줬다. 나는 유독 땀이 많은 체질로 태어났다. 어른이 되면 효과가 날 것이라던 땀 안 나게 하는 보약이 아직까지도 소용없는 것을 보니 아직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나 보다. 모쪼록 멜버른의 8월 날씨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온도, 그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해외에 가본 경험은 전부 동남아시아권이었다. 그래서 막연히 서양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유럽과 미국 등 서양이 안 좋은 이유를 계속 떠먹다 보니 내 머릿속은 '그래 한국인이 한국에서 살아야지.' '역시 한국만 한 나라 없지'라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서양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불편하고, 불합리하고,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만들어진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은 살아가기 어렵다는 환상을. 하지만 너무 기대가 낮아서였을까? 공항은 기다리지도 않고 모든 과정이 프리패스로 진행되었고, 간편하고 쉽고, 편리했다. 나는 너무 빨리 나와서 뭐 잘못한 줄 알았다. 마지막에 앉아있던 용지를 받던 관리인은 내가 위험한 사람일지 아닐지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내가 유일하게 관심 없던 분야가 '다른 나라'여서 호주가 서양권이라고 불러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조금 있었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공항을 나와 중심지에 도착하자 말끔히 해소되었다. 멜버른은 정말 누가 봐도 서양 세계였다.
나는 멜버른에서 열흘간 살게 되었다. 하도 호주의 물가가 살벌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내 몸만 한 캐리어 2개 중에 하나는 먹을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멜버른에서 보내는 동안 식비를 최대한 아껴보자는 마음으로 햇반보다 가격이 싼 오뚜기 밥과 그동안 쌓여있던 명절의 훈장인 참치캔들을 가져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참기름을 소분하고 고추장과 함께 세팅을 끝냈다. 해야 할 일들을 끝내고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내가 묵은 숙소는 바로 앞에 퀸 빅토리아 마켓이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이곳이 멜버른에서 가장 유명한 시장이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고, 그냥 동네 사람들이 항상 장 보는 경동시장 정도의 포지션인가 하고 말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은 정육점과 해산물이 있는 곳은 아직 거기밖에 보지 못했고, 타조알부터 여러 기념품까지 굉장히 큰 시장이었다는 점이 체감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모르는 놈들은 감사할 줄 모른다고 공용 숙소에서는 따로 뭐 해 먹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나여서 그냥 산책 겸 사람 구경 겸 한 번씩 걸어 다녔을 뿐, 호주의 모든 시장은 이런 느낌일까 하고 착각하고 있었다.
멜버른은 그렇게 걸어 다니기만 해도 좋았다. 당연히 날씨가 280% 정도 버프를 해준 것도 있지만 그뿐만은 아니었다. 첫째로 건물 양식이 새로워서 좋았다. 우리나라의 건물들을 보면 대부분 높은 건물에 무엇인가 일관성이 없는 느낌이다. 환경에 맞춰 건물들을 아웃테리어하는 것이 아니라 내 건물만큼은 내가 하고 싶은 개성을 뽐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구성이다. 40년 된 다 빛바랜 노란 간판 전주 음식집 옆에 공주풍의 에뛰드 하우스가 있는 느낌이라면, 멜버른은 자신이 튀는 것보다 거리 자체가 일단 색감이 통일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흔히 서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의 건물들이 일단 기본적으로 각을 맞춰 세워 놨고, 그 미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은은한 개성을 뽐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나라와 전혀 다른 건물 양식과 상점, 음식점들을 보는 경험은 내게 특별했다. 또한 대부분이 음식점인 우리나라와 다르게 미술품이라던지, 장식품이라던지 하는 예술품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정말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이 많았다. 인도, 베트남, 일본, 한국, 중국.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있었다. 멜버른에서 교통카드를 만들고 돌아다닐 생각은 없어서 열흘간 그 주위에만 걸어 다녔으므로 내가 본 것의 한계는 있겠지만 내가 느낀 것은 그랬다.
두 번째로 걸어 다니기 참 좋은 환경이었다. 내가 서울에서 지역 간의 격차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나는 서울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뒤떨어지는 동네에서 자라 왔는데, 지인을 따라서 서울에서 가장 비싼 동네를 걷게 된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그날은 걷는 게 기분이 좋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비싼 건물들, 새로운 것들을 보고 접했으니까 그런 거겠지'하고 넘기다 문득 내가 걷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내가 걷고 있는 우리 동네는 사람 둘은 지나갈 수 없게 좁은 보도블럭에 2미터에 하나씩 커다락 가로수를 기르고 있었고 차도 반대쪽에선 관리가 되지 않은 무성한 풀들이 종아리를 간지럽혔다. 자연스럽게 풀이 없는 도로 쪽으로 걷다가 가로수 옆 출구로 나가며 간지러워지고, 다시 도로 쪽으로를 반복하며 술 취한 사람처럼 갈지자걸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도블럭이 중간중간 물이 고여있는 곳이 많았고 그 뜻은 고저차가 울퉁불퉁한 길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발목을 접질리기 쉬워 애초에 차도로 걷는 사람이 즐비했다. 후일에 지인에게 물어보니 이런 동네일수록 불편한 것이 생기면 바로 민원을 넣어서 유지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에서 민원이란 단어는 거의 개인의 권리 쟁취를 위해 사용되었다. 명품과 짝퉁의 차이는 디테일이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동네는 세상을 가까이서 보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언제나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를 보려고 목을 빼든 사람들이 모여 있던 동네였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지역 간의 격차를 느꼈다.
그런 점에서 멜버른은 참 걷기 좋은 도시였다. 잘 정리된 도로. 접질릴까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보도.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빽빽하지만 블럭과 블럭 사이, 그러니까 건물 뒤 쪽엔 넓은 공터가 있어서 주차 공간도 확보되어 있는, 뺵빽함과 여유가 뒤섞인 쿠키 앤 크림 같은 도시였다. 빽빽한 곳에서 사람들을 마주치고 잠시 한적한 뒷 쪽 공터를 거닐다, 상점을 구경하고를 반복하니 정말 살기 좋은 곳이라 느꼈다. 나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생각을 한다. 하고 싶다, 않다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멜버른을 걷다 보니 여기서 살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정도였다. 그냥 걷기만 하는데 내가 이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 이상해서 사유를 해보니,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이유가 떠올랐다. 무려 '웃음'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지역 간의 격차를 크게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은 애초에 '비싼 동네에서 살아볼 경험이 없어서'였다. 잠깐 방문해 보면 딱히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한국에서 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눈을 깔거나 초점 없는 흐린 눈, 핸드폰에 고정된 시선이나 건물들을 보며 나는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음을 표출해야 한다. 눈을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우연이라고, 오해라고 최대한 어필하듯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하지만 호주에서는 달랐다. 눈을 마주치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다. "how are you?" 처음엔 윽, 엑, 억 거리면서 당황했던 나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굳, 할류?"를 건네게 되었다. 처음에 당황했던 것도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되는지를 몰라서였다. 챗 gpt를 통해 그냥 굳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나가던 할머니의 "how are you"에 자연스럽게 "굳"이라고 대답했던 처음이 비로소 내가 이 세계의 여행자가 아니라 이방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음을 느끼게 해 준 순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는 것이 느껴지자 그동안 내가 왜 이렇게 멜버른의 거리가 걷는 것이 편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눈치도 볼 필요 없었고, 따가운 시선이나 경계도 필요 없었다. 한국에서 걷는 것이 무언가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를 몸으로 뚫고 가는 기분이었다면 이곳은 그냥 자유롭고 가벼운 공기를 가르며 걷는 느낌이었다. 날씨도 워낙 변화무쌍해서 나처럼 반팔 반바지에 슬리퍼, 후드 집업에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놓고 가는 사람과 코트에 목도리까지 한 사람까지 다양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한 걱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 오니까. 솔직히 서양은 개인주의고, 동양은 전체주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했다. 서양은 이기적이고 동양은 이타적일 것이라고. 서양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집단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동양은 집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가치관이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딛고 있는 호주가 서양의 개인주의를 표방하고 있고, 내가 살아왔던 한국이 전체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면 개인주의니 전체주의니 하는 것들은 이기심과 이타심으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느낀 개인주의는 개인이 가장 우선시되기 때문에 각자의 개인을 자신처럼 존중해 주는 느낌이었고, 한국에서 느낀 전체주의는 전체가 가장 우선시되기에 전체의 정체성을 깨뜨리는 것들을 배제하는 느낌이었다. 호주와 우리나라는 자신이라는 객체를 바라보는 시점이 달랐다.
그렇게 나는 참치와 오뚜기밥을 돌려 먹으며 열흘 간 걸어 다녔다. 지금도 오히려 이 10일의 기억이 더 많이 난다. 남들이 보면 소금 안친 곰탕처럼 슴슴한 여행이었겠지만 내겐 그 잠깐의 산책과 지지리 궁상들이 참 좋았던 시간이었다. 물론 이 열흘이 좋기만 하진 않았다. 그 짧은 사건이 아직도 내게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어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