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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Nov 14. 2019

[8] 사무실에서 워라밸을 강요하지 마세요

인정받는 미생의 디테일한 습관

삶을 산다는 것이 순리대로 이루어진다면 더없이 좋으련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순리대로’라는 말은 참으로 뜬구름 잡는 표현처럼 들린다. 더더욱 빠른 시간 안에 최대한의 성과를 내야 하는 오늘날에 순리대로라는 말은 어쩌면 저 멀리 안드로메다에서나 가능하려나 싶다. 


갑작스레 어느 날부터 워라밸 이야기가 사무실에 돌기 시작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에 주 52시간 근무가 법으로 정해지더니 뉴스마다, 회사마다 워라밸이 화두다. (300인 이상 근로자가 근무하면 대기업이라는 말도 뉴스를 통해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work and life balance’의 머리글자를 따서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일까 싶었다. 300인 이상 대기업이 아닌 우리 회사는 워라밸과 여전히 거리가 먼 것일까? 그래도 다른 회사에서 한다고 하니 은근히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 하고 싶어진다.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물론 여전히 정시 출근을 하느라 팀 내에서 눈치를 보고 있지만 말이다. 




회사에서도 뭔가 회의를 통해 이러한 움직임에 동참하려는지 사내 공지로도 안내가 되기 시작했다. ‘여러분의 정시 퇴근을 지지합니다. 근무시간은 알차게, 퇴근시간은 기쁘게.’ 이런 포스터까지 사무실 곳곳에 붙었다. 아, 이거 현실적으로 가능해야 할 텐데 말이다. 


박 차장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그래서인지 옆 팀에 팀장이 자꾸 우리 쪽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여러분, 워라밸 포스터 봤죠? 근무시간에 바짝 일하고 퇴근은 정확하게 합시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자고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스을쩍 왔다가 이 말만 던져놓고 스을쩍 사라진다. ‘그쪽 팀원들이나 일찍 보내주세요. 맨날 말로만 그러지 마시고. 본인이 제일 늦게 퇴근하시니 팀원들이 눈치가 보여서 워라밸은커녕 노라밸 하게 생겼으니까요.’ 이상하게 회사에만 오면 부정적인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맴도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한테도 안 좋은 건데.’




우리 부서에 이 과장은 여전히 자신의 업무만 묵묵히 하고 있다. 평소 워낙 말이 없는데 그 사건 이후로 그냥 아침 조회 겸 진행사항 체크하고 업무 관련 문의가 있을 때만 말을 하지 아예 말이 없다. 점심도 같이 먹지 않다보니 뭔가 파견 나와 있는 분들 같아서 마음이 무겁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편하기도 하다.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로 위 1년 선배가 늘 나의 일을 확인하고 있으니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배의 업무가 하나 더 늘어 괜히 나한테 심술을 부릴 뿐.


분위기가 무거워져 마음은 편치 않지만 퇴근시간에 대한 자율성은 조금이나마 보장되어서일까 팀 내부에서 워라밸을 시행하려는 듯 하나둘 정시 퇴근 후 상황에 대해서 점심식사 중에 보따리 풀 듯 꺼내놓기 시작한다. 나야 선배들 숟가락 챙기랴, 젓가락 놓으랴, 물 따르랴, 음식 주문하랴 정신이 없어서 워라밸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나, 이번에 동남아 여행 다녀와야겠어요. 그동안 프로젝트에 프로젝트만 쌓이고 넘쳐서 번아웃 되어버렸으니 여행 정도는 갔다와줘야 나 스스로에게 미안하지 않을 거 같아요. 재충전이란 게 이럴 때 필요한 게 아니겠어요.”


“전, 퇴근 후 요즘 발레 수업을 신청했어요. 정시 퇴근까지는 아직 마음이 편치 않아 바로 못하니 조금 더 일하다가 퇴근하는데요. 8시 클래스 정도도 괜찮더라고요. 의자에만 앉아서 일하다보니 허리가 자주 아팠거든요. 발레가 그렇게 자세 교정에 좋대요. 동작들 때문에 뭔가 자존감도 생기는 거 같아요. 당당해 보이잖아요.”


“그동안 못 봤던 미드나 몰아서 챙겨봐야겠어요. 늘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 날에만 겨우겨우 챙겨봤는데 이제는 평일에도 챙겨볼 여유가 생겨서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신입은 워라밸 어떻게 생각해요?”     




음식 주문하다가 말고 물어보는데 다들 나도 듣고 있다고 생각했나보다. 이렇게나 나에게 관심이 없다니. 아니다. 차라리 관심없는 게 낫지. 관심 가졌다가 더 피곤해질 테니까.      


“글쎄요. 아직 신입이라 워라밸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차차 퇴근 후 하고 싶은 게 생기겠죠. 여전히 일찍 퇴근하는 게 쉽지 않아서요.”     


사실 워라밸을 이야기하기보다 나는 우선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빨리 익숙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여전히 어리버리 신입 취급 받는 것은 싫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워라밸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약간 부담스럽기도 하다. 업무 숙달이 필요한 나에게 다짜고짜 워라밸부터 꺼내다니 말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준비가 되면 알아서 할 거라고요. 뭘 그리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물어보세요. 너, 나, 잘, 하, 세, 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겨우 참으며 음식 주문을 끝냈다. 




더불어 워라밸이 이슈가 될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당연한 것을 어찌 보면 다들 이제야 반강제로라도 실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낯설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하여튼 워라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이런 거나 좀 안 시키면 좋겠다. 나도 마음 편하게 점심 좀 먹었으면 좋겠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인가 보다. 더없이 권력적인 동물이기도 하다. 내가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단 한 번도 “제 것은 제가 할게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이야기해준 적이 없다. 그러면서 무슨 워라밸이람.


그래도 이제는 퇴근도 못 하고 저녁식사 때 이렇게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 나도 일부 워라밸을 찾은 거 같기는 하다. 생각해보면 참 그동안 쓸데없이 열심이었다. 이렇게 식사 준비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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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 헨리 포드     


오늘날 1일 8시간 노동을 이야기할 때 미국의 자동차왕이자 포드의 창립자인 헨리 포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근대적인 대량 생산 방식에 의해 자동차를 대중화하고 자동차 시대를 개척한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기계를 좋아해 학업을 중단하고 15세부터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였다. 1899년까지 에디슨회사에서 기술책임자로서 근무하기도 했던 그는 1903년 자본금 10만 달러로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조립 라인 방식에 의한 양산체제인 포드시스템을 출범시켰으며, 합리적인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1914년 동종업계의 2배에 달하는 최저임금 하루 5달러, 1일 8시간 근무라는 획기적인 노동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물론 이로 인해 제품가격은 인하하여 판매는 늘어났고, 생산효율은 높아져 생산량을 늘릴 수 있었다. 더불어 시간적인, 그리고 금전적인 여유를 가진 직원들이 포드 자동차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5퍼센트가 아니라 95퍼센트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포드의 생각은 착착 맞아떨어져 갔다. 마이카의 시대가 펼쳐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훗날 그의 경영 방식은 시대를 거듭할수록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혁신적이었으며 휴머니즘적이기도 했던 것이다. 휴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그의 발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1920년대 미국의 유머작가이자 배우였던 윌 로저스는 헨리 포드를 두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는지, 괴로움을 주었는지를 알려면 100년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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