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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Nov 15. 2019

[10] 말 못할 김 부장의 미생일기

인정받는 미생의 디테일한 습관

차장님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다. 다른 부서에 계시니 딱히 부딪힐 일은 없지만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수집하듯 오는 이들이 있다. 


“박 차장님, 얼굴이 반쪽이 되었더군. 딱히 부하직원도 없고, 뭘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시는 분위기인가봐.”


“그러게요. 그런데 뭔가 조심은 하셨어야 해요. 부하직원을 가르치는 것과 윽박지르는 것은 분명 다른 거잖아요.”




이런 이야기들이 공기 중에 섞여 우리 팀으로까지 넘실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는다. 뭔가 소리 없이 결정을 내린 우리 팀만의 암묵적 사실이라고나 할까. 현재 전체적인 일은 과장님이 처리 중이다. 그런데 임원 분들의 결재가 필요할 때는 건너 팀에 김 부장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결재라인으로 그쪽으로 바뀐 것이다.


무섭기로는 김 부장님도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박 차장님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성격이 불같고 다혈질인 차장님과 달리 부장님은 소리 한번 지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10센티미터 위에서 A4 종이 한 장 흩날리면 바로 싹둑 잘릴 것만 같은 날카로운 칼과 같다. 


더불어 일 처리는 정말 누구도 못 따라간다. 상사의 눈빛만 보고도 모든 일을 실수 하나 없이 해내는 아프리카 세렝게티의 맹수의 왕 사자 같다고나 할까. 거의 살아 있는 전설 정도로 알려져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런 그 분도 미생 시절에는 어리바리하게 보냈다는 소문이 몇 년째 돌고 있다고 했다.      




“이봐 자네. 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야 출근하는 거야? 사표 쓸 생각하고 그러는 거지?”


“결재와 결제 단어 차이도 몰라? 대학까지 졸업하고서 맞춤법이 틀리면 어쩔 거야. 시험 보고 들어온 거 맞어? 낙하산 아냐?”


“지금이 몇 신데 퇴근할 생각인 거야. 얼른 더 일 안 하고. 할 일이 태산인데. 선배들 지금 밥도 못 먹고 일하는 거 안 보여?”     




이런 구박과 멸시를 수도 없이 들었다는, 저 멀리 숲속 마을 소문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어떻게 지금처럼 되었냐고? 바로 그 위에 사수로 있던 선배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선배는 지금은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셨지만 몇 년간 김 부장님은 잘 챙기면서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한 50가지 법칙 같은 전설의 비법을 차근차근 알려줬다고 한다. 


왜 그렇게 알려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김 부장님이 지적을 받으면 받을수록 바로 위 사수에게 불똥이 튀니 그걸 사전에 막아보고자 하는 방책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러한 가르침이 잘 먹혀서 지금은 전설의 김 부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평생직장의 개념이 있었기 때문에 이 회사에서 어떻게든 해법을 찾고 솔루션을 만들어가려는 것이 당연한 모습이었으리라.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90년대 후반 말로만 듣고 수업시간 중에나 알게 되었던 국가부도의 위기를 거치면서 직원의 개념이 달라진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기업과 직원이 가족 같은 관계처럼 형성되었다가 그 순간 이후로 비즈니스 관계가 되었으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기업은 더욱 필요한 인재를 찾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는 자신의 몸값에 걸 맞는 대우를 받고서 이직하는 일들이 빈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도 일상화 되어버린 헤드헌터, 계약직, 정직원 이런 단어들이 당시에는 없었다고 하니 말이다. 




비하인드 스토리는 알 수 없겠지만 선배에게 혹독하게 트레이닝 받았을 김 부장님을 생각하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곤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 피곤할 거 같다. 회사 내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피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니까. 


김 부장님은 성과 최우선주의를 추구하는 분이다. 카리스마가 넘치는 모습으로 회의도 좌지우지하시는데 부하직원들이 다들 눈치를 보느라 그에 잘 따라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늘 화를 내진 않지만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김 부장님은 아무래도 영화 <어벤져스>에서 닉 퓨리 국장쯤 되고, 어벤져스 군단 정도를 이끌어야 속이 편안하실 듯하다. 그런데 어디 그러한 눈높이에 맞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쉬울까. 아래 직원들만 죽어나는 것이다.




늘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여러 번 엿들었다. “연차, 칼퇴, 주 52시간 다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심지어 사이사이 일이 있으면 저의 재가를 받고서 잠시 다녀오세요. 그런데 성과만큼은 충분히 내셔야 합니다. 그러한 것에 부족한 모습을 전 견디지 못합니다. 제 스타일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입에 서슬 퍼런 칼을 물고 이야기하는 듯하여 모두가 후덜덜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인생에는, 그리고 직장생활에는 정답이 없겠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분 밑에서 제대로 배워 나를 빛내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회사가 대해주는 만큼 나도 딱 그만큼만 움직여야 하는 것일까? 내일 어찌 될지 모르는데 내 몸을 불사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내적갈등을 일으키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톡톡 두드린다. 선배였다.


“30분 전에 끝냈어야 하는 엑셀 자료는 왜 빨리 안 주는 거죠. 조용하신 과장님도 벌써 여러 번 이야기하셨어요. 며칠 전부터 프로젝트 함께하게 된 거 잘 알죠?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사장님 곧 들어 오신다는데 발표 가야 합니다.” 세상에나, 이렇게 넋을 놓고 있었다니. 이런 상황을 겪어보면 뭔가 제대로 김 부장님처럼 배우고서 일을 처리해나가는 것이 좋을 거 같기는 하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나는 회사에서 생활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고민이 들기 시작하는 거 보니 내게 일이 더 많아졌나보다. 된장. 당분간 칼퇴는커녕 9시 이전에 퇴근하기는 틀린 듯하다. 그래도 김 부장처럼 직장 생활하기는 싫다는 생각이 더 들기 시작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나는 90년대 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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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만날 수 있다. 온 존재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 마르틴 부버     


마르틴 부버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유대계 사상가이자 랍비문학가인 동시에 사업가였던 살로몬 부버의 손자이다. 그는 할아버지에게서 헤브라이어와 유대 시오니즘에 대해 배웠다. 이후 유대 신비주의로 알려진 카발리즘에 매료되었는데 특히 신은 한 개인이 자신만의 사고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는 개념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사고 때문에 그는 칸트, 키르케고르,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탐독하기에 이른다. 이들의 철학에 대한 목마름으로 1896년부터 그는 비엔나, 취리히, 베를린 등에서 철학과 예술사 등을 공부한다. 


부버의 사상은 할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은 유대적 신비주의를 바탕으로 한 유대 인간관의 재현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관계 내에서 형성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한 종교적 실존주의 철학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현대사회가 겪는 최대 문제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인간상실, 인간소외 등에 대해 고민하면서 나와 너의 관계를 설정하고, 참된 관계만이 현대인의 실존 부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마르틴 부버. ‘만남’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철학에 적용했던 그는 삶을 만남으로 여기면서 대화, 관계, 만남, 사이 등의 용어로 만남을 정의하고자 하였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도 소중하다고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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