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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remy Nov 13. 2019

[7] 세련된 아재는 Yes, 불통 꼰대는 No

인정받는 미생의 디테일한 습관

“이 과장. 일 이렇게 할 거야? 내가 오늘 아침까지 해둬야 한다고 얘기했어, 안 했어. 왜 이렇게 업무를 이 따위로 하는 것이야. 30분 내로 안 끝내면 사표 써.” ‘또 시작이다. 또 시작이야.’ 아침부터 박 차장은 난리법석이다. 과장님에게 지시해둔 일이 어제 퇴근 무렵이었는데 다 하지 못했다고 아침부터 이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정말 쥐 잡듯 사람을 후려잡는데 어찌나 목소리를 쩌렁쩌렁 울려대는지 옆 팀에서 사람들이 힐끗힐끗 지나가는 척하면서 계속 쳐다본다. 몇 명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사장님까지 내려올 기세이다.  


‘사장실까지 들으라고 소리치는 거야 뭐야. 퇴근할 때 일 줘놓고 아침까지 안 했다고 저렇게 난리피우는 게 말이나 돼? 저러니 회사에서 꼰대 ‘넘버 3’에 들지. 사람이 아니라니까 정말.’ 직장뿐만 아니라 사회에는 분명 또라이 보존의 법칙이 존재한다. 어딜 가나 꼭 한 명 이상의 또라이가 존재한다는 사회성 짙은 법칙이다. 그런데 혹시나 우리 회사에는 없는 거 같다고? 그렇다면 분명하다. 당신이 또라이로 인정받고 있을지 모른다. 스스로를 잘 챙겨볼 필요가 있다. 




우리 팀에서는 박 차장이 바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이 과장은 표정마저 무심해 보인다. ‘뭐지, 저 느긋해 보이는 표정은. 이렇게 난리를 피울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니면 될 대로 되라지 하는 표정인가. 정말 알기 힘든 표정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저 밑에서 저러한 고충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왔을까 싶어서 측은한 마음이 든다. 분명 집에서는 사랑받는 남편이자, 존경받는 아버지로, 누군가의 든든한 아들로 살아왔을 터인데 여기서는 왜 이러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인간은 정말로 현실적이다. 그 상황에서 그 누구도 박 차장의 억지논리를 반박하고 나서지 못한다. “이게 말이 되냐고요. 전날 퇴근 시간에 줘놓고, 아침까지 해놓으라니 말이 되냐고요.” 누구도 이렇게 사이다 발언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 갑자기 이 과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처절해 보이는 뒷모습에 대고 박 차장은 여전히 쇼미더머니급 랩 속사포를 쏘아댄다. 왜 그러는 것일까 도대체가. 회사란 정말 이런 곳일까. 말도 안 되는 비상식이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곳일까? 직급이 올라갈수록 아랫사람은 젠틀하게 감싸고, 여유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저절로 장착되는 것은 아니란 말인가. 


본인도 사회 초년병 시절, 저렇게 배우고 성장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아버지처럼 살기 싫어요’라고 외치던 아들이 훗날 우연히 거울을 바라보다가 그 아버지와 너무나 닮은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는 그런 상황의 데자뷔란 말인가. 5분이 지났다. 10분도 지났다. 과장님이 오지 않는다. 대리님이 부랴부랴 일 뒤처리를 하고는 있지만 왠지 걱정이 되었다. 




박 차장이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 시간 정도 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듯이 앉았다. 아침부터 사무실 전체를 울리게 한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다음 날 박 차장은 출근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빨리 출근하고서 직원들 오는 순서를 체크하던 분인데. 과장님도 출근하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소문은 정말 빠르게 돌았다. 과장님은 어제 아침 그 일이 있고서 바로 사장실로 갔다고 한다. 비서실에서 막았지만, 눈빛을 보고서 비켜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약 10여 분의 단독 면담. 이후는 소문에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난리법석이었다. 어제는 넘쳐나는 소리로 회사가 난리였는데, 오늘은 침묵으로 난리가 났다. 




며칠 후 과장님이 돌아왔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랬는지. 박 차장도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로 오지 않았다. 다른 부서로 갔다는 말만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박 차장 책상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언제, 누가 치운 거지? 왜 며칠째 몰랐지?’ 궁금증에 궁금증은 커져만 갔다. 며칠 동안 회사는 거대한 침묵 속에서 고요한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나 역시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문이 잠잠해졌다. 모든 것이 빠르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야 할 일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자신이 겪어야 할 일일 수도 있지만, 자신이 겪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일상의 영역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빈자리는 덩그러니 남았지만, 그 자리는 계속 채워지지 않고 있었다. 그랬다고 해서 누구 하나 일을 잘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시곗바늘처럼, 그리고 그 뒷면에서 칼같이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처럼 착착착 움직여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시곗바늘은 멈춘 적이 없다. 톱니바퀴 중 한 면이 부서진 적도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시계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꼰대 중의 꼰대, 박 차장의 자리는 그렇게 계속 비어 있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철학자들 중에서 니체만큼 우리에게 인기가 있는 철학자를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누가 철학책을 사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은 수많은 작가들에 의해 현대적인 가르침을 덧붙여 편역되어 왔다. 그만큼 니체의 사상은 평범한 다수가 품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은 참혹하고 인간은 한계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각자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철학은 현대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반면 그의 정치철학은 무수히 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석의 다양함 때문에 20세기 파시즘과 나치즘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왜곡과 과장이 덧씌워져 그들의 선전에 악용되기도 하였다. 더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귀족적 망상이나 독재적 권력을 대변하는 철학자로 언급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해석이 수많은 오해를 낳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니체는 소박하지만 창조적인 힘이 드러나는 철학을 대중에게 설파하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외부 권력 또는 자기 분열에 굴복하여 그에 따라 타락하지 말고 스스로를 계속 들여다보고 깨우쳐 달라지고 발전하는 나를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괴물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오늘날 살아가는 데도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는 표현이라 하겠다. 


부정적인 모습을 보아왔다고 해서 그와 똑같이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에서 벗어나 햇볕 아래에서 가치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니체의 철학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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