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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5. 2020

시어머니, 시누의 종교

이혼 전 이야기 #.8

친하게 지내는 지인 중에 보험영업을 하는 분이 계셨다. 나를 참 아끼고 이뻐해 줘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동네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내겐 언니같이 참 좋았던 분이었다. 영업하면서 판촉물이나 감사선물로 가지고 있던 생활용품을 자주 주셨는데 하루는 치약세트를 받아와 집으로 갖고 들어왔다.


퇴근을 하고 집에 들어서자 시어머니가 그 치약세트를 마치 벌레 보듯 거실에 던지며 말했다.

"너 대체 어디서 이런 이상한 걸 갖고 왔냐! 일부러 집안에 갖고 들어왔냐?"

"네?"


치약 상자에 사군자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대나무 그림이 문제였다.

시어머니에게 대나무는 무속인을 상징했다.


시누 말에 의하면 시어머니는 젊었을 때 무속신앙을 완전히 숭배하셨다고 했다. 옛날 분들은 거의 미신을 믿었을 테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렵던 그 옛날 마음을 기대는 어쩌면 하나의 문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시면서부터 조상을 섬기는 제사나 일체의 무속 신앙 냄새가 나는 것은 파르르 떨며 멀리하셨다. 성경에도 나 이외의 신을 섬기지 말라고만 했을 텐데 시어머니는 그것을 과잉해석하셨는지 대나무는 물론이고 매화꽃 그림이나 절, 무속인과 관련된 그림이나 사물을 보면 아주 치를 떨었다.


마치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순결한 신앙에 스크래치가 난다고 생각하셨는지  TV 채널에서 불교방송이 나오면 욕을 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채널을 돌렸다. 마치 '안 본 눈 삽니다'이런 것 같았다.


"그냥 단순히 그림인거잖아요, 어머니."


소용이 없었다. 내가 기쁘게 받아온 누군가의 성의는 그렇게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쳐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었다.

당장 갖다 버리라고 난리를 치시는 통에, 다음날 출근하는 버스에 치약세트를 껴안고 올라탔다. 한동안 직장에서 사군자 그림이 그려진 치약을 짜며 씁쓸한 양치를 해야 했다.




결혼하고 보니 제사가 없는 집안이었다. 하지만 제사는 있었다. 단지 교회를 다니는 시어머니와 살아서 제사상을 집에서 차리는 일만 없었을 뿐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누들은 기독교, 시아주버님은 무교였다. 당연히 제사를 지냈다.

교회를 다니면서부터 '사탄에게 음식을 올리는 짓거리'라며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는 시어머니와 '지금까지 조상님 제사를 모셨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제사를 안 지내요, 그건 기독교 문화잖아요.'라며 제사를 고집하는 아주버님 사이에서 고생하는 건 며느리들 뿐이었다.


신혼초에는 큰며느리인 형님이 제사상을 혼자 차리면 내가 느지막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큰집에 갔다. 고생하며 큰며느리 혼자 정성 들여 차려놓은 제사상 앞에 시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엎어져서 통성기도를 했다. 이 죄를 용서해 달라며 눈물을 뿌렸고, 형님은 애써  차린 제사상이 통째로 욕을 먹는 상황을 그저 물끄러미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 풍경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양복을 입고 절 할 준비만 하고 있는 아주버님과 남편을 보았다. 


지독하게 여자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체면치레만 생각하는 치졸하고 멍청한 남자 새끼들이라고 욕을 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한이 된다. 시어머니는 제사상에 올라갔던 음식은 쌀 한 톨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형님은 시어머니가 드시는 밥과 국, 반찬을 매번 따로 준비했다.


어느 해 가을 시아버지 제사가 있던 날이었다. 시어머니는 이제 시아버지 기일에도 더 이상 큰아들 네 가지 않았다. 제사 지낼 거면 안 간다고 했다. 그래서 아주버님 내외분만 제사를 지냈다. 


나는 동서의 입장이라 제사상을 형님 혼자 준비하시게 하는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머니가 못 가게 하는 걸 알고 있었기에 형님은 늘 괜찮다, 신경 쓰지 말라고 이해를 해주셨는데 그날따라 너무 죄송했다. 퇴근하는 길에 들러서 얼굴이라도 뵈려고 큰집에 갔다. 


형님은 더운 날 좁은 집에서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계셨다. 

"동서. 내가 이 집 안에 시집오고 나서 20년이 넘도록 외며느리 하고 있다가 이제 동서가 들어왔잖아. 나는 그래도 명절이나 제사 때 남들처럼 형님, 동서 하며 음식도 같이 만들고 시엄니 흉도 같이 보고 그런 게 참 하고 싶었는데..."


말이 형님이지, 형님에겐 나만한 딸이 있었다. 말하자면 딸 같은 동서가 들어온 것이었다. 결혼하면서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 보니 명절마다 각자의 집에서 형님은 제사상을, 나는 시가 사람들이 1박 2일 먹을 분량의 음식을 홀로 해야 했다. 혼자 제사상을 준비한 형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면, 이틀 전부터 대가족의 음식을 준비하느라 피곤에 절어있는 나를 보셨다. 


시어머니는 그래도 종교가, 하나님이, 권사로서의 직분이 중요한 듯했다. 명절 때 한 번도 두 며느리가 머리를 맞대고 하하 호호하며 음식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죄송했다. 

그야말로 잠깐 얼굴만 비추고 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형님께 드렸다

"형님, 매번 제사 때마다 정말 죄송해요. 장 보시느라 돈 많이 쓰셨죠? 조금밖에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 길로 부랴부랴 집에 왔다.

평소보다 퇴근이 늦자 시어머니는 큰아들 집에 전화를 하셨던 모양이다.

"너는 내가 가지 말라고 했는데 왜 거길 갔냐? 시어미 말이 우습냐? 제사 그딴 거 지내는데 가라고 그랬어, 가지 말라 그랬어?"


곧이어 시누이의 전화

"거기를 왜가? 우리 엄마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는데, 우리 엄마 무시해? 무시하는 거냐고! 엄마가 백날 집안 잘되라고 하나님께 기도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올케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 하고 다니는데!"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날 대꾸하지 못했다. 내가 잘못한 줄 알았나 보다.

재미있는 건 시아버지 제사 때는 그렇게 못 가게 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다음날이면 다시 모여 술과 음식을 먹으며 형제애를 과시하는 집안이었다.


어쩌다가 꿈에 남편(시아버지)이 나오면 시어머니는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방 안에서 통성기도를 했다. 귀신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새벽부터 딸네 집에 전화를 해 '지난밤에 귀신이 꿈에 보였는데 내가 기도로 물리쳤다.'라고 간증을 했고, 시누는 잘하셨다며 전화기를 붙들고 같이 기도를 해줬다.


"그래도 아버지인데 저라면 꿈에서라도 보니 반가울 텐데 왜 사탄이에요?"

라고 물어보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다가 죽었으니 분명 지옥에 갔을 거고 마귀라고 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죽으면 그런 거라고 했다.


놀라웠다... 

내가 알기론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 세종대왕, 간디.... 하다못해 위인전에 등장하지 못하는 크고 작은 위인들도 불교나, 무교가 많을 텐데 그분들이 다 지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있다고 생각하니 시가의 종교적 논리대로라면 세상이 참 불공평하다 싶었다.


형님은 지금도 제사음식을 홀로 준비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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