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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6. 2020

"경찰관님, 남편의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혼 전 이야기 #. 10

** 이번 글을 쓰면서 브런치를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이상 그때에 대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아서요... 잊혀진 줄 알았던 그때의 기억들을 글로 풀어내려니 몸살감기를 앓듯 온몸과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폭력보다 더 잔인한 것은, 그날에 대한 나의 기억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며칠이나 글을 고쳤습니다. 곰국을 고을 때 국물 위로 뜨는 불순물을 찬찬히 걷어내듯 그 당시 내가 받았던 느낌을 배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단어를 빼고 또 뺐습니다. 읽고 다시 또 읽을수록 그날의 기억을 곱씹어야 해서 이제 그만 수정하고 올리기로 했습니다**

 




더웠던 7월이었다.

얇은 원피스 잠옷 한 장만 입고 아이들과 거실에서 자다가 별안간 머리가 들려 올라가는 느낌에 잠을 깼다.

상황을 알 수가 없었다. 머리는 계속 아프고 시어머니의 “얘가 왜 이러니, 애들 깬다!! 잘못한 게 있어도 말로 해야지. 이 손 놔, 손 놔!”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어머니,  그냥 자고 있던 제가 뭘 잘못했나요??) 

남편이 술을 먹고 들어와 자고 있던 내 머리채를 잡고 현관 밖으로 끌어내려하고 있었다.


황당했지만, 저항하면서 소리를 지르면 아이들이 깨서 이 웃지 못할 희한한 광경을 볼까 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끅끅 거리며 버텼다. 술기운에 천하장사가 된 남편은 내가 식탁 다리를 잡고 버티자 주먹으로 내 빰을 내려쳤다, 한번, 두 번, 세 번... 

맞으면서도 잡고 있던 식탁 다리가 부러졌다. 더 버티면 아이들이 깰 것 같았다.

결국 아파트 복도로 질질 끌려 나갔다. 옛날 아파트라 복도식이었다. 끌어낸 것만으로 분이 안 풀렸던지 죽으라며 열려있는 복도 창문으로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래 여보. 4층에서 떨어지면 최소한 불구가 돼서 다시 올라오진 못하겠지.
그럼 나 이제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마음속에서 체념의 말이 절로 나왔다. 살다 살다... 이런 날도 결국 오는구나. 내 결혼 생활이 이렇구나...


떨어지지 않으려는 나와 창문 밖으로 밀려는 남편, 그걸 보며 말리는 시어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4층 이웃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남편을 보고 소리쳤다.

 미쳤어요? 사람 죽일 거예요?!

주민들이 남편을 떼어놨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정하라고, 참으라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결혼생활 10년이 되도록 남편과 크게 다툼이 없었다. 시어머니가 계시다 보니 말도 서로 조심했고 젊은 부부가 고성을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누가 슝을 본다며 여보라는 단어도 쓰지 말라고 했다. 서로 00 엄마, 00 아빠,  당신이라고 불렀지, 우리는 서로 ‘너’라는 단어도 쓰지 않았다.


그랬던 우리가 사소한 말다툼도 아닌 아파트 주민들을 다 깨운 그야말로 심각한 싸움을 하는 젊은 부부가 되어 있었다.

반대편 복도 끝에서 남자들에게 붙잡혀 있는 남편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결혼하고서 이전에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른 날이었다.


“이 개새끼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체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머릿속의 회로가 뒤죽박죽이 된 느낌이었다. 잠옷은 늘어날 대로 늘어나 있고, 온몸에는 복도를 끌려 다닌 흔적이 남아있었다. 남편에게 주먹으로 맞은 얼굴은 욱신거렸고 두피는 칼로 찢은 듯이 아파왔다. 그렇게 평소에 친하지도 않던(심지어는 처음 본) 이웃들에게 나라는 사람의 결혼생활 그 민낯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왔다. 

나는 피해자로 남편은 가정폭력 가해자로 경찰서에 연행되어 갔다.  

피해자 진술서를 쓰고 멍이 들고 부은 얼굴, 뜯긴 두피를 당직 경찰관에게 사진 찍히고 있는데 남편이 밖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나도 피해자라고요! 나도 맞았어요!!”


이날 일에 대해 나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시어머니는 시가 사람들에게 ‘아비가 그런 애가 아닌데 둘 다 술 먹고 옥신각신 싸우다가 어미가 말대꾸를 자꾸 해서 일이 커졌다’라고 말했다.

피해자 진술서를 써서 내니 경찰관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정폭력으로 처벌을 원하십니까?-


“네.”


그걸 말이라고 물어보나? 자다가 별안간 맞았다. 그것도 남편한테 맞았다. 처벌하지 않으면 상이라도 주랴?


최초 신고를 접수한 지구대에서 경찰서로 이동해 진술서를 다시 한번 더 썼다.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 경찰서는 취객과 시비가 붙은 사람, 인사불성 된 사람들로 시끄러웠다. 숨 막히는 침묵이나 얼굴이 부은채 앉아있는 나에게 시선집중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그런 분위기가 나았다. 


흥분해서 무조건 콩밥을 먹이겠다고 분노했던 지구대에서와는 달리,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애들 아빠였다. 

결국 경찰서에서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피해 정도를 확인받고 집에 오는 길에 가까운 응급실로 걸어 들어갔다. 얼굴에 혹시나 멍이 있으면 출근을 못한다고 직장에 전화할 참이었다. 

"어떻게 하다 다치셨어요?"

피곤해 보이는 응급실 당직의사 선생님이 건조하게 물었다. 짧게 대답했다. 차트에 적는 것이 보였다.

-폭행에 의한 외상/남편-

눈에는 실핏줄이 터졌고, 경찰서에서 차마 사진 찍지 못한 엉덩이와 허벅지에는 멍이 들어있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응급실을 나섰다. 새벽 4시였다. 현관에 들어서니 기다리던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가 들어온 것을 아시고는 불 꺼진 거실에 누워서 아이들이 깰세라 시어머니는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내 아들 경찰서에 쳐 넣고 와서 속이 시원하냐? 시원해?”

......

‘네 어머니. 그런데 너무 피곤하네요. 2시간 뒤에 출근해야 되니까 저 눈 좀 붙일게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무뎌진 감각으로 침대에 쓰러지듯 잤다.

1시간도 채 못 자고 비몽사몽 일어나 화장을 했다. 다행히 멍이 크진 않았다. 뺨이 부어오르긴 했지만, 눈에서 실핏줄이 터져있었지만 그럭저럭 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늘 타던 06:15분 광역버스 안에서 불과 몇 시간 전의 일들을 떠올렸다.

차창에 머리를 기대자 뜯긴 두피가 욱신거렸다. 눈물이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다만 어릴 때 무방비 상태로 아빠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몸서리가 쳐졌다. 




유년시절 기억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아버지라는 남성에게 맞은 순간들.

아빠가 술에 취하신 날이면 늘 매를 맞았지만 엄마에게 막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엄마도 술만 먹으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빠 앞에서 무기력했다. 친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언니에게 왜 나는 맞아야 하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묵묵히 다 맞고 서있었다. 도망갈 곳도 없었고 어린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발로 차면 차는 대로, 맞다가 코피가 나면 나는 대로 그냥 그렇게 매가 멈출 때까지 서있었다. 

그리고 내가 맞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나는 성인이 되었고 엄마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니 영원히 맞지 않을 거라는 신앙 같은 믿음이 있었다.


"나는 맞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야. 

나는 소중해, 유일하게 나를 때리던 아빠는 오래전에 죽었으니까."


그런데 불과 몇 시간 전에 모르는 사람도 아닌 남편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고 이웃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리저리 개처럼 끌려 다녔다.

모멸감과 분노가 내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이 뜨거웠다. 끓어오를수록 창밖을 내다보는 내 눈빛이 차가워진다고 느껴졌다. 

놀랄 정도로 차분했다. 

이제는 무언가 결심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결심해야 하는 때임을 직감했다.


직장에서 어떻게 일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퇴근 후 시어머니 앞에 가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저 때문에 힘드시죠? 저도 그러네요. 애들 아빠가 죽든, 제가 죽어서 나가든 이 집에서 한 사람은 죽어야 돼요. 안 그러면 안 끝나요, 이 상황들이요.”

“뭐? 시어미한테 뭐라고 했냐 지금?”

아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릴 것 같던 시어머니였는데, 아들을 대신한 사과는 없었다. 걔가 얼마나 속이 상했으면 그랬겠냐고 애들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남편이 아닌 어머니와 심리적으로 먼저 이혼한 순간이었다. 

자식이라는, 어머니의 가장 민감하고 아픈 부분을 나도 찔렀다.

가정일에 소홀하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대신해 시어머니와 나는 마치 부부처럼 집안일과 육아를 분담하며 살아왔었다. 남편과 있는 시간보다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내 아이들을 봐주시는 시어머니에게 감사했다. 남편은 늦게 들어오지만 어머니는 늘 나와 같이 살림을 해주는 분이고 아이들을 키워주시는 분이라 마치 남편같이 의지를 했다. 그런 어머니를 마음에서 버리기로 했다. 자식을 둔 같은 엄마로서 당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미 나를 버린 어른이었다. 




주말에 핏기 없는 얼굴로 지구대를 찾아갔다. 며칠 전 어느 아파트에서 신고된 사건 확인서를 발급받고 싶다고 했다. 

"아, 며칠 전 밤에 지구대 오신 분이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날 당직을 섰던 경찰관이 근무 중이었다. 출력해서 주며 내게 말했다.

"당장 이혼 그런 거 안 하더라도 증거는 모아놓고 계세요. 식구 때리는 거요, 한 번이 어렵지 상습범 됩니다. 뭐 남편 되시는 분이라 그렇긴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혼이 좀 나야 돼요."

감사하다고 목례를 하고 나왔다. 아무도 내편이 아닌데, 그 소리가 내게는 '너 힘들지?'라는 말로 바꿔 들렸다. 지구대를 나오는데 며칠 전에도 안 나오던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외래진료를 갔다. 

며칠 전 응급실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담당의사가 별다른 말없이 소견서를 써주었다. 전치 2주를 써주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의 소견처럼 2주 만에 다 낫고 없어질 기억이면 참 좋겠다 싶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그날의 기억들을 파일에 모아두었다. 당장 뭘 할 건 아니었다.


폭행이 있고 나서 다음날 남편이 문자를 보내왔다. 

-직장에서 나만 잘리진 않을 거야. 너도 같이 잘리게 할 거야!!-

경찰서에서 가정폭력범으로 직장에 통보가 되었던 모양이다. 


직장에서 전화가 왔다. 단순히 술을 마시고 생긴 가정불화가 아니냐고 물었다. 남편을 선처할 거냐 어쩔 거냐고 내게 물었다.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습니다."

남편이 피해자의 진술서 양식을 받아와 내게 건네주었다. 양식대로 써서 달라고 할 뿐 별말이 없었다.

사과도, 혹은 무마시켜줘서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그래 넌 딱 거기까지인 인간이야


늘 그랬듯 대화 없이 며칠이 지났다. 퇴근하던 남편이 집 밖에서 좀 보자며 문자를 했다. 폭행에 대해 사과를 할 건가? 사과든 뭐든 관심이 없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서 죽이고 있는 중이었다. 

적어도 내 마음 안에서 남편이란 사람은 인간 이하였다.


한차례 소나기가 온 뒤 그친 날씨였다. 

집 앞 호프집에 마주 앉았다. 얼굴은 보지 않았다. 속이 메슥거렸기 때문이다.

단둘이 마주 앉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토록 이야기 좀 하자고 해도 거절했던 사람이었다.


남편이 이혼이란 단어를 꺼냈다. 

서로 몇 마디가 오고 가고 난 뒤 나는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한 달만 집구 할 시간을 줘 애들 데리고 나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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