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극배우 B씨 Aug 27. 2020

먼저 갈게요 형님. 안녕히 계세요.

이혼 전 이야기 #.11

밤샘근무가 끝나면 지체 없이 3천만 원짜리 전셋집으로 달려갔다. 

근무 후에 갈 곳이 없어 맥없이 시어머니의 가시 박힌 눈초리를 받으며 집안에 머물거나 90% 이상은 시누의 전화였던 집전화 벨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는 것보다 온몸에 쉰내가 나는 그 노동이 차라리 좋았다. 행복했다.

방문 페인트와 싱크대 경첩 교체를 시작으로 샤워기도 갈고 뜯어진 벽지에는 포인트 벽지를 덕지덕지 붙였다.


이혼 전 이야기 #.2   홀로 둥지를 만들다


하나에 천 원 하는 접시와 밥그릇과 수세미, 칼, 국자.... 하나하나 사서 채우기 시작했다. 집에서 쓰던 것은 젓가락 하나도 가지고 나오기 싫었다. 주방에 있는 것 대부분은 시어머니와 남편이 이미 오랫동안 써왔던 것들이었다.


욕실에는 특별히 몇천 원을 더 주고 캐릭터 칫솔 거치대를 달았다. 

아이들이 이걸 보고 환하게 웃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눈앞은 뿌옇게 흐려졌다.

중고가구점을 돌아다녔다. 선풍기와 식탁, 통돌이 세탁기, 장롱, 전기밥솥... 모든 걸 중고로 샀다. 수중에는 돈이 별로 없었다.


암 진단을 받은 후 보험금을 꽤 받았었다. 내게 목돈이 있는 걸 안 남편은 조심스럽게 부동산 이야기를 했다. 직장동료가 추천한 아주 알짜배기 땅이라며 6개월이면 원금에 수익까지 얹어서 주겠다고, 너무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다. 몸에 칼을 대서 암을 꺼내고 받은 3천만 원을 줬다. 남편은 자신의 명의로 땅을 샀다고 했다.


무주택자인 우리는 주위의 권유로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계약금도 없었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내가 암에 걸리고 보험금이 나오자 남편은 남은 보험금 4천만 원으로 계약금을 넣고 싶어 했다. 남편 명의로 계약금을 넣었다.


이혼에 앞서 별거를 결정하고 나서, 재산분할이 아니라 엄연히 내 보험금인 돈을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파트는 중도금이 들어가고 있었기에 다 지어지면 팔아서 계약금은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문제는 3천만 원 땅이었다. 등기를 떼보니 남편 명의가 아니었다. 부동산에 전화를 해서 사기를 친 거냐고 미친년처럼 소리를 질렀더니 남편이 수개월 전에 이미 팔았다고 했다.


남편에게 땅을 팔았는데 수익이 얼마냐고 왜 상의도 없이 벌써 팔았냐고 물었다. 땅을 팔아서 나온 돈을 후배가 급하다고 해서 빌려줬다고 했다. 그 후배가 누구냐고, 내가 전화해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돌려받겠다고 했다. 그 후배가 누군지, 빌려준 게 맞는지 끝끝내 남편은 말하지 않았다.

보험금을 돌려달란 이야기를 할 때마다 '돈돈 거린다.'라고 했다. 나중엔 그게 왜 전부 당신 돈인 거냐고 짜증을 냈다.


일단 보험금은 잊자고 마음먹었다. 나오지 않을 돈 때문에 더 이상 울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아끼고 아껴 중고가구와 가전을 최소한으로 사 왔다. 몇 개 안 되는 가구지만 집안에 들이니 처음의 그 휑했던 집안이 조금씩 사람 사는 집 같았다.


이사를 일주일 앞둔 시점이었다.

이혼하기로 했고, 숙려기간 3개월조차 한 집에 있기 싫어한 남편 뜻대로 아이들과 먼저 집을 구해 나가기로 한 날이 드디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 집 식탁에서 한참 어린 올케에게 훈계해 마지않았던 시누도, 혼자 집 나가서 사니 속이 편하고 좋으냐고 전화로 물었던 시누도, 아주버님도, 나만큼 컸던 시조카들도, 어느 누구 하나 전화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명절 때마다 우리 집에서 1박 2일을 먹고 놀며 핏줄을 과시했던 그 모든 사람들이 단 한통의 문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감사했다. 

마지막까지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남편과 그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집안의 맏며느리, 형님에게는 인사를 하고 싶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나와 같은 '외부인'이었기 때문이다.

형님도 행복하시겠지만(그렇게 믿고 싶지만) 나 혼자 이곳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다시 외며느리로 남을 형님이 불쌍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형님, 저예요. 지금 좀 뵈러 갈게요


형님이 일하시는 농장으로 갔다. 형님 역시 신혼초에 10년 가까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서 나에게 늘 고생이 많다고 하셨다. 최근 우리 부부 사이가 금이 가고 집안이 편하지 못하다는 것을 시누들에게 들어서 알고 계셨을 것이다. 


한 시간을 달려 농장에 도착하니 형님 딸인 시조카가 작은 엄마인 나를 보자마자 인사도 없이 쌩하니 나가버렸다. 

나랑은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 시조카였다. 시조카들은 유독 남편이랑 사이가 좋았다. 남매처럼 함께 컸다고 들었다. 시가와 사이가 틀어지니 손아래 시조카마저도 나를 본체만체했다.


"저 오늘 형님 마지막으로 봬요. 이 집에서 애들 데리고 나갑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놀라는 눈치였다. 젊은 혈기에 그냥 남편과 싸우는 것이려니 여겼는지, 호기롭게 지금은 나가지만 곧 들어올 거라는 뉘앙스의 말로 타이르려고 하셨다. 아빠 없이 어떻게 여자 혼자 아이를 둘이나 키울 거냐고 시어머니도 좀 더 늙으시면 잠잠해질 거라고 조금만 더 동서가 참으라고 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거기까지만 말씀하셨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형님은 그동안의 내 결혼생활에 대해 '전지적 시누 시점'에서 말씀하셨다. 더 듣지 않아도 시누들이 시시콜콜 일러바치지 않고는 나와 자주 왕래가 없던 형님이 알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동서가 애들 아빠랑 잠자리도 안 해줬다며? 어머니랑 밀치고 싸우고 늦게 들어오고 마음대로 가출하고 시누들 와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온 나에게 지루하게 몇 가지 사례를 술술 꺼내놓으셨다.

처음엔 나도 분노가 슬슬 올라왔다. 하나하나 내 잘못이라는 사건들을 말할 때마다 진위에 대해 설명을 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습니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말을 멈췄다. 그리고 형님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형님. 저는 이제 이 집안에서 내 새끼들 데리고 나갈 사람이고요, 형님은 앞으로도 쭉 이 집 가족으로 사실 분이시죠? 그럼, 제가 방금 한 말들은 다 잊고 그냥 시누들 이야기가 맞으려니 여기세요. 나가는 마당에 시누들 말이 틀렸다고 조목조목 짚어봤자, 결국 형님 식구들 흉이잖아요. 제가 잘못되었고 시가 사람들이 옳았다고 생각하시는 게 형님한테도 이제는 좋을 것 같아요."


야속했지만 형님을 이해하기로 했다. 

형님은 이 사람들과 30년을 가까이 가족으로 살았고 나는 기껏 십 년도 안 되는 신참이었다. 시누가 시어머니가 남편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들과 앞으로도 살아야 하는 형님은 뭐가 되는가.



안타까웠다.

신혼초에 시누들이 비밀스럽게 말했다. 큰오빠가 옛날에는 책 장사도 하면서 돈을 다발로 벌었는데 한참 잘 나가서 아파트 사고 차사고 좋은 동네에 살 때 새언니가 좀 더 아꼈어야 했는데 벌어오는 족족 사치를 많이 했다고. 큰오빠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돈이 없으니 망한 거라고, 새언니가 좀 더 아꼈으면 지금 큰집이 이렇게 내려앉지는 않았을 거라고...


형님에 관련된 굉장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새언니 흉을 보는 사람들이 나에 대한 흉을 보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걸 그때는 순진해서 알지 못했다. 형님네는 돈이 모일 수가 없었다. 시누들이 주말이면 가족들을 다 데리고 가서 밤이고 낮이고 밥을 함께 먹었다고 했다. 사람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얼마나 무서운지, 명절과 시댁행사를 하면서 나도 익히 느꼈던 바였다.


니 형님은 결혼하고 2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친정 간단 소리는 안 해봤다!

결혼하고 6년이 넘도록 한 번도 명절 연휴에 친정에 가보지 못한 내가 어느 구정 아침, 떡국 먹고 친정에 가겠다고 선언하자 시어머니가 밥상에서 내게 하신 말씀이었다.


"어머니, 형님을 친정집에 20년이나 넘게 안 보내신 게 정상인 것 같으세요? 어머니 딸들이 20년 동안 명절 연휴에 형님처럼 상만 차리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맞받아쳤었다. 시어머니에게 내 딸, 내 사위는 중요했지만 내 며느리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아오셨던 형님이었다.

젊었던 시절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을 알게 된 날 머리를 싸매고 눕자, 남자들 사회생활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다고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고 드러눕냐고 모진 소리를 하는 시어머니에게 지금껏 서운하다고 하셨던 형님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쪽 말만, 시누들 말만 듣고 나에게 따져 묻는 형님이었다. 다시는 안 볼 형님이었다.

"뭐 어찌 됐든 잘 살아. 가끔씩 연락도 하고 그래."


"형님, 동서 노릇 더 못하고 나가서 죄송해요. 그런데 저 이제 가면 이 집안사람들과는  안 만날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형님한테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뵐 일이 없을 겁니다. 건강하세요."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뒤를 흘깃 보았다.


익숙한 곳이었다. 1년에 두어 번은 시가 사람들이 다 모여서 그들만의 즐거운 잔치, 보신탕을 끓여먹고 놀던 곳이었다. 물론 형님과 나는 음식 준비, 설거지 담당이었다.


이곳에 다시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도착하자마자 주방보조를 하고 설거지 나오기 전에 급하게 밥을 먹고, 얼근하게 술이 취한 남편 대신 운전대를 잡고 시어머니, 아이 둘을 태우고 컴컴한 밤에 출발하던 그 기억들에서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전 10화 "경찰관님, 남편의 처벌을 원하지 않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