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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극배우 B씨 Aug 29. 2020

아내, 며느리 명찰 반납합니다.

이혼 전 이야기 #. 13

이혼하기로 서로 합의를 보고 며칠 되지 않아 남편은 이혼 접수를 하러 가자고 문자를 했다.

평소에도 매사에 급한 게 없었던 남편은 일처리를 해도 나에게 부탁을 했었는데 이혼만큼은 나도 모르는 준비서류를 이미 착착 챙겨 왔다.


우리처럼 어색하게 주뼛거리며 멀찍이 떨어져 앉은 부부들 사이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양육권이나 재산분할은 합의가 되신 거죠?"

"네."

분할할 재산도, 친권은 어떻게 할지도 아직 정하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는 한마음으로 대답했다.

어린 자녀들이 있어 3개월간의 숙려기간 후에 다시 한번 나와야 한다고 했다.

몇 분 되지 않아 이혼 접수가 되었고 그렇게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이사업체와 스케줄도 잡았고, 아이 유치원에도 통보를 했다. 버리고 갈 내 짐들은 모조리 분리수거를 해버렸다. 아이들의 색연필, 장난감 하나까지 다 담았다. 애들 앨범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챙겼다.

욕실에 들어가 5개의 칫솔 중에 나와 아이들 칫솔 3개를 뽑아 들었다.







애들 방에 있는 책상과 책만 실을 거예요. 안방에 있는 짐은 일부만 실을 건데 그건 얼마 안 되니 제가 박스에 따로 담아놓을게요

견적을 내러 온 이사업체 사장님께 이삿날 실어야 할 물건에 대해 일일이 가르쳐주었다.


"사모님, 주방 물건도 하나도 안 가져가시는 거지요?"

"네. 주방에는 아예 가져갈 것이 없어요. 제가 말씀드린 이것만 실어주세요"


이사업체 유니폼을 입고 온 낯선 남자가 이방 저 방을 돌며 종이에 체크를 하자 시어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내게 물어보진 않았다. 이미 아들이나 시누들이 귀띔을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되돌릴 수가 없는 일이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하셨겠지.


그동안 아들하고만 대화할 뿐 서로 투명인간 취급을 했던 시어머니와 나는 이사 전날까지 말이 없었다.


이사하는 날이 되었다.

손녀들과 며느리가 짐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을 지켜봤자 속만 상하실 테니 남편에게 미리 그날은 어머니를 시누 집에 모셔놓는 게 좋겠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답장도 어떤 액션도 없었다. 그래 이제 와서 내가 누굴 염려하랴. 당신 어머니이고 이제 당신 혼자 감당해야 할 일들이다. 십여 년간 내가 잠시 맡아했던 효도, 다시 당신에게 물려주고 간다.


무거운 가구도 가전도 없으니 이사업체에서는 두 사람만 와서 박스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짐을 빼고 있는데 갑자기 교회 부목사님이 오셨다. 시어머니가 교회에 말씀하셨던 모양이다. 어색하게 나와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부목사님은 어머니와 거실에서 갑자기 통성기도를 하셨다.


시어머니는 이삿짐을 싸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울면서 기도를 했다. 찬송을 불렀다.

......

시어머니는 하나님을 찾으며 구슬프게 우는데 악바리 같은 며느리는 꾸역꾸역 짐을 싸고 있었다.


사탄에 씐 며느리가 손주 새끼들 다 데리고 집안을 엉망으로 해놓고 나가는 형국이었다. 나가는 그날까지 며느리 허전할까 봐 가슴에 돌덩이를 차곡차곡 얹어주고 있었다. 두고두고 약한 노인에게 시어머니에게 한 행동에 대해 없는 죄책감 느끼라는 건가.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인사드릴 생각도 없었지만, 목사님이 집안에 들어와 함께 슬퍼(?)하고 우는 것을 보니 그나마 있던 미운 정마저 정리될 것 같았다.

남편은 이 상황들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있었다.

어서 내가 사라져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의 고통에 늘 저렇게 무기력 아니 적극적인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사람.

자신의 핏줄들을 필사적으로 챙겼던 참 든든한 막내아들이자 귀한 남동생이었던 그들의 사람.

함께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낳고 요즘 같은 세상에 젊은 부부가 참 화목하게 잘 산다고 늘 칭찬을 받았던 남편은 자신의 가정이 산산조각 나는 현장에서 목사님의 축복기도를 덧붙여 보내주고 있었다.


남편아.

그래 이제는 처자식을 버리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이 가정을 지키라.

어머니와 그 옛날 총각시절처럼 알콩달콩 잘 살거라. 처자식과 맞바꾼 어머니를 제발 끝까지 책임지고 모셔라.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잠시 머물렀던 남자와, 그의 어머니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딸려왔었던 시가 사람들을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누구의 아내/누구 집 며느리/누구의 올케, 동서라는 내 명찰을 떼서 버리고 나왔다.

다시는 가슴팍에 꽂지 않을 색이 바랜 그 명찰을 말이다. 들어갈 땐 혼자 몸으로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아이 둘을 품에 안고 나왔다.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고 멍도 들었지만 어쨌거나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내 새끼들을 힘껏 껴안고 나왔다.

동굴을 나서니 한동안 눈이 부셨다.





이사짐 차를 먼저 보내고, 부동산을 정리해 내 보험금을 돌려준다는 것과 숙려기간이 끝나는 3개월 뒤 법원에서 만나 협의이혼으로 마무리짓는 조건으로 이사 나간다는 사실을 공증으로 남겨야겠다고 했다.


그야말로 돈 한 푼 없이 몸만 빠져나가는데 이 사람을 인간적으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내 결심이 흐트러지거나 남편이 또 딴소리를 할까 봐 분명히 해놓고 싶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이 사람과 법적으로 연결되고 싶지 않았다.

공증을 받는데 5만 원이 들었다. 남편은 돈을 낼 생각도 없는 듯했다.


공증 사무실 앞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담배를 물며 남편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당신도 나도. 어디 한번 각자의 포지션에서 힘닿는 데까지 잘 살아보자고.'


새로운 내 둥지를 향해 가는 길, 10년 넘게 살아 익숙했던 동네를 지나고 있었다.

큰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신발을 신고 걸음마를 하던 작은 길과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던 학교, 아이와 떡볶이를 먹던 사거리 분식집, 남편 없이 시어머니와 아이들을 업고 주말마다 다녔던 교회...


지병이 있으셨던 어머니를 모시고 한 달에 한 번씩 고혈압약을 타기 위해 다녔던 병원, 그 앞에 약국.


이제는 다시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날씨가 참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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